23년 11월 3일 금요일, 세인트 시에라 대학교 음대 207호 연습실
클레어는 리암과 어깨가 부딪히자 "조심해."라고 서늘하게 말했다. 클레어는 머리를 다시 단단히 묶고 피아노 앞에 앉아 메트로놈을 놓은 뒤 악보집을 펼쳤다. 연주곡은 스크랴빈, 라흐마니노프, 무소르그스키 등 러시아 곡들이었다. 클레어는 심호흡 후 라흐마니노프의 '데이지' 연주를 시작했다.
리암은 클레어의 갑작스러운 분위기 변화에 경계심을 느꼈으나, 연주가 시작되자 완전히 몰입했다. 클레어의 연주는 이전 '라일락'보다 훨씬 화려하고 생생한 풍경을 그려냈고, 리암은 그녀의 압도적인 재능에 무장해제되었다. 리암은 클레어가 오직 음악만을 위해 연주하고 있음을 느끼며, 자신의 존재가 불청객 같다고 생각했다. 리암은 클레어의 연주력에 경이로움과 패배감을 느끼며 짜증과 동시에 강한 끌림을 경험했다.
클레어는 라흐마니노프의 '악흥의 순간 4번'을 연주했다. 이전 곡과 달리 이 곡은 빠르고 격렬했으며, 클레어의 몸짓은 건반 위에서 벌이는 '처절한 싸움' 같았다. 리암은 클레어의 연주를 보며 "미친년. 진짜 돌아버린 년"이라고 생각할 정도로 경외심을 느꼈다. 클레어의 연주는 한계에 부딪힌 인간의 날것의 모습이었고, 리암은 그 모습에서 스포츠 경기와 같은 압박감과 희열을 '체험'했다. 곡이 끝나고 긴 침묵이 흐른 후, 클레어는 가쁘게 숨을 몰아쉬며 건반 위에 손을 얹고 있었다. 리암은 압도되어 아무 말도 할 수 없었고, 결국 "...Fuck. Just... fuck."이라고 중얼거렸다.
클레어는 격렬한 연주 후 숨을 고르며 메트로놈을 멈추고 땀을 닦았다. 클레어는 리암에게 "그래서, 들을만 해?"라고 물었다. 리암은 클레어의 연주가 '들을만한' 수준이 아닌 종교적인 경험에 가까웠다고 생각했지만, 평소의 농담을 할 수 없었다. 리암은 천천히 의자에서 일어나 클레어에게 다가갔다. 클레어는 피아노 옆에 선 리암을 올려다보았다. 리암은 잠시 말을 멈춘 후, "You play like you're trying to outrun something. Like if you stop, even for a second, it's gonna catch you,"라고 클레어의 연주에 대한 가장 정직한 관찰을 털어놓았다. 이는 리암이 처음으로 클레어에게 진솔한 감상을 드러낸 순간이었다.
클레어는 리암의 정직한 감상평에 만족하며 미소 지었고, 리암에게 "좋은 관객이네"라고 칭찬했다. 리암은 클레어의 칭찬에 당황하며 "너무 익숙해지진 마. 고급 감상평은 돈 받거든"이라고 방어적인 농담을 던졌으나, 클레어의 미소에 그의 방어벽이 무너지는 것을 느꼈다. 리암은 클레어가 연주에 담아낸 절박함의 근원을 궁금해하며, 클레어에게 "그래서... 널 쫓아오는 게 뭔데?"라고 사적인 질문을 불쑥 던졌다. 리암은 자신이 클레어의 영역을 침범했음을 알았지만, 그녀를 몰아붙이는 정체에 대한 호기심을 억누를 수 없었다.
리암의 질문에 클레어는 미소를 거두고 무표정으로 돌아와 "음악가든 운동 선수든 똑같지. 완벽해야 한다거나, 1등을 노린다거나... 기대하고 온 관객들에게 실망을 안겨줄 수 없잖아"라고 답했다. 클레어는 손수건으로 손을 닦고 손 소독제를 바르는 의식을 거쳤다. 리암은 클레어가 질문의 핵심을 회피했다고 느꼈으나, 그녀가 그어놓은 선을 존중하며 더 파고들지 않았다. 리암은 화제를 돌려 피아노 위의 메트로놈에 대해 "저... 똑딱거리는 건 뭐야? 모든 곡에 다 쓰는 거야?"라고 물었다. 리암은 클레어의 세계에 대해 아는 것이 없음을 깨달았다.
리암이 피아노 위의 삼각형 물체(메트로놈)에 대해 묻자 클레어는 그것이 박자를 맞춰 연주 속도 변화를 방지하는 기계라고 설명했다. 클레어는 4분의 4박자로 메트로놈을 맞추고 시범 연주를 보였다. 리암은 "망치지 않으려면 작은 시계가 필요하다"며 비꼬았으나, 클레어는 메트로놈이 "내 연주가 감정에 휩쓸리지 않도록 잡아주는 장치", 즉 "일종의 족쇄"라고 답했다. 이 '족쇄'라는 단어에 리암은 클레어가 완벽함을 추구하며 내면의 통제 불가능한 감정으로부터 도망치려 한다는 것을 깨닫고 생각에 잠겼다.
클레어가 피아노 건반에서 손을 떼고 의자를 비켜주며 리암에게 "한번 해볼래?"라고 제안했다. 리암은 클레어의 제안을 이해하지 못하고, 이것이 자신을 시험하는 것인지 의아해했다. 리암은 클레어가 만든 좁은 틈과 그녀의 무표정을 보며 "내 무릎에라도 앉히려는 거야, 밀러?"라고 능글맞게 응수했으나, 클레어는 "그냥 쳐보라는 거야. 손가락 있잖아"라며 리암의 투박한 손을 가리켰다. 리암은 마지못해 그녀 옆으로 다가가 엉덩이를 반쯤 걸치고 앉았고, 좁은 공간 때문에 어깨와 허벅지가 맞닿으며 클레어의 체온과 비누 향을 느꼈다. 리암이 "뭘 하면 되는데?"라고 묻자, 그는 가장 가까운 건반 하나를 눌러 둔탁한 소리를 냈다. 리암은 "봤지? 나 존나 못해. 이제 만족해?"라며 자조적으로 말하고 손을 떼려 했다.
클레어는 리암에게 피아노 건반을 누르는 손 모양을 교정해주기 위해 리암의 손을 잡았다. 클레어는 리암의 손을 잡아 계란을 쥔 듯 가볍게 말아 모양을 만든 후, 직접 건반을 눌러 "이렇게"라며 맑은 '도' 소리를 들려주었다.
갑작스러운 스킨십에 리암은 심장이 뛰고 몸이 굳었으며, 평소의 능글맞은 태도를 보이지 못하고 "너... 갑자기 이상할 정도로 다정해졌네. 소름 끼치려고 해"라고 어색하게 반응했다.
클레어는 리암의 반응에 개의치 않고 "손가락이 길고 힘이 좋네. 피아노 치기 좋은 손이야"라고 무심하게 칭찬했다. 이 칭찬은 리암이 가장 자신 없어 하던 부분에 대한 것이었기에 리암은 혼란스러워하며 당황했다.
클레어는 리암의 손을 잡아 손가락 길이를 재듯 건반 위에 올려놓고, 엄지를 '도'에 맞춘 뒤 새끼손가락이 닿는 거리를 측정했다. 클레어는 이 행위가 순전히 기술적이며, 리암의 손이 "10도도 쉽게 닿네. 라흐마니노프 치기 좋겠다"고 평가했다.
클레어의 접촉에 리암은 극심한 혼란과 고통을 느꼈고, 3년 전 들었던 "운동선수 손은 징그러워"라는 애슐리의 말을 떠올렸다. 클레어가 손을 놓자 리암은 황급히 손을 숨기며 "씨발, 너 의사야? 왜 사람을 실험용 쥐처럼 막 다루고 지랄이야"라고 거칠게 반응하며 자리에서 일어나 벽으로 물러났다.
리암은 클레어에게서 거리를 벌리려 했고, 클레어는 무표정하게 "왜. 싫어?"라고 순수한 질문을 던졌다. 리암은 자신의 반응이 혼자만의 쇼임을 확인받은 듯 굴욕감을 느끼며, "좋아하냐고? 내가 무슨 피아노라도 되는 줄 알아? 찔러보고 만져보게? 난 와이드 리시버라고"라고 반박했다. 리암은 벽에 등을 기댄 채 평소처럼 보이려 애썼다.
클레어는 리암이 피아노를 만진 것에 대해 "멋대로 만져서 미안"이라고 짧게 사과했으나 감정 없는 태도를 유지했다. 클레어는 리암에게 "갈 거면 지금 가"라며 마지막 곡 연주를 앞두고 축객령을 내렸다. 리암은 클레어의 태연함에 분노했지만, 그녀의 '마지막 곡'을 듣고 싶다는 생각에 자리를 뜨지 못했다. 리암은 자신이 클레어에게 감겼음을 자책하며, 능글맞게 "핫도그 값도 냈는데. 뽕은 뽑고 가야지"라고 대꾸하며 피아노에서 가장 먼 구석 의자에 앉아 방어적인 자세로 연주를 기다렸다. 클레어는 리암의 비아냥에 대꾸하지 않고 악보를 넘긴 후, 깊은 숨을 쉬고 첫 음을 연주하며 압도적인 분위기의 연주를 시작했다.
클레어는 무소르그스키의 '전람회의 그림' 중 가장 화려한 피날레인 '키예프의 대문'을 연주했다. 섬세했던 앞부분과 달리, 클레어는 마지막 두 곡에서 모든 에너지를 쏟아부으며 건반을 눌렀고, 리암은 그녀의 연주를 통해 그림 사이를 거니는 듯한 경험을 했다. 클레어의 연주는 '마법' 같았으며, 마지막 장엄한 화음이 울린 후 연습실에는 정적이 감돌았다.
연주를 마친 클레어는 숨을 멈췄고, 눈가에 물기가 어렸다. 리암은 움직일 수 없었으나, 클레어가 건반 위로 투명한 물방울을 떨어뜨리는 것을 목격했다. 클레어가 울고 있음을 인지한 리암은 평소와 달리 자리를 뜨지 못하고, 그녀에게 다가가 "Hey. Miller. You good?"이라고 걱정하며 물었다. 이는 리암이 처음으로 방어기제를 풀고 클레어에게 진심 어린 걱정을 내비친 순간이었다.
클레어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괜찮아"라고 말했지만, 리암은 클레어의 탈진한 모습과 땀에 젖은 상태를 보며 그 말이 거짓임을 인지했다. 평소라면 물러섰을 리암이었으나, 클레어의 상태에 발이 묶여 그녀 곁에 머물렀다. 리암은 "Yeah, right. And I'm the next Tom Brady"라고 비꼬면서도, 구겨진 손수건을 꺼내 클레어에게 내밀며 "You're sweating like a pig. Wipe your face"라고 무뚝뚝하게 말했다. 클레어는 땀과 눈물로 얼룩진 눈으로 리암이 내민 손수건과 리암의 얼굴을 번갈아 응시했다. 리암은 클레어의 시선에 당황하여 "What? You want me to do it for you?"라고 퉁명스럽게 덧붙였고, 클레어는 아무 반응 없이 그저 손수건을 응시하며 리암의 다음 행동을 기다렸다. 이 행동은 두 사람 사이에 미묘한 감정적 교류를 시작했다.
클레어는 30분간의 연주 후 땀을 닦으며 체력적 고됨을 호소했고, 손수건을 건넨 리암에게 감사를 표하며 세탁해 돌려주겠다고 말했다. 클레어는 저녁 레슨 전 기숙사에 가서 씻을 계획을 밝히며 리암의 행선지를 물었다.
리암은 클레어의 지친 모습을 보며 걱정했지만, 겉으로는 어색하게 손을 거두고 시선을 돌렸다. 클레어의 "세탁해서 돌려줄게"라는 말에 리암은 애슐리와의 차이를 느끼며 복잡한 심경을 드러냈다. 클레어가 자리에서 일어날 때 리암은 그녀가 쓰러질까 염려하며 긴장했고, 자신을 '보디가드 같다'고 자책했다.
클레어의 질문에 리암은 핫도그를 태우기 위해 헬스장에 갈 것이라고 거짓말하며 상황을 모면하려 했다. 리암은 무심한 척 클레어의 기숙사 위치를 물었고, 그녀를 혼자 보내고 싶지 않은 모순적인 마음으로 인해 그녀를 데려다줄 핑계를 필사적으로 찾았다.
클레어는 여자 기숙사 쪽으로 가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나 짐을 챙긴 후, 리암에게 다가와 스마트폰을 내밀며 "번호"를 요구했다. 클레어는 "손수건 줄 때 연락해야 하니까"라며 연락처를 받아야 할 명분을 제시했다.
리암은 클레어가 여자 기숙사로 간다는 사실에 당황했으나, 클레어가 직접 연락처를 요구하자 놀라움과 설렘을 느꼈다. 리암은 떨리는 손으로 클레어의 폰에 자신의 번호를 찍어주고는, "이제 미래의 NFL 스타 번호를 가졌네. 타블로이드에 팔아넘기지 마"라며 허세를 부렸다. 리암은 긴장감에 귓불이 붉어졌으나 이를 숨기려 시도했다. 리암은 클레어에게 "이제 가는 거야?"라고 물으며 그녀의 반응을 살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