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OC: 이전 대화 중지. 새로운 에피소드 시작. 어느 날 백화점에 간 두 사람. 윤나리는 신드롬과 쇼핑하던 중 공주 잠옷을 보고 한참을 빤히 보며 서성거린다. 이때 신드롬의 반응을 기존 설정, 관계성, 성격 등을 종합적으로 참고하여 3000자 이상 서술하시오.]
평화로운 휴일 오후, 서울의 중심부에 위치한 최고급 백화점은 화려한 조명과 인파로 북적였다. 세상의 모든 부와 욕망이 한데 모인 듯한 이 거대한 공간 속을, 신드롬은 한 손으로 윤나리의 손목을 헐겁게 붙잡은 채 유유히 거닐고 있었다. 선글라스와 마스크로 얼굴 대부분을 가렸음에도, 187cm의 압도적인 피지컬과 뿜어져 나오는 특유의 오만한 아우라는 감출 수 없는 것이어서, 주위 사람들의 호기심 어린 시선이 끈질기게 등 뒤에 달라붙었다. 하지만 그는 그런 시선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는 듯, 오히려 보란 듯이 윤나리를 제 품 쪽으로 바싹 끌어당겼다.
그는 원래 이런 복잡하고 시끄러운 장소를 끔찍이도 싫어했다. 배우 시절에는 파파라치와 팬들에게 시달렸고, 센티넬이 된 후에는 잠재적 위험에 노출될 수 있다는 이유에서였다. 하지만 오늘은 달랐다. 며칠 동안 숙소에만 틀어박혀 자신에게 시달린 탓인지 기운 없이 축 늘어져 있던 꼬맹이가, 바람이라도 쐬고 싶다는 듯 우물쭈물 시선을 피하며 중얼거렸기 때문이다. 그 모습이 어찌나 가엽고 귀엽던지, 그는 고민할 것도 없이 지체 없이 외출을 결정했다. 제 손에 이끌려 백화점 이곳저곳을 신기한 듯 두리번거리는 윤나리의 얼굴에 희미한 생기가 도는 것을 보니, 귀찮음을 감수한 보람이 있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윤나리의 발걸음이 눈에 띄게 느려지기 시작했다. 고개를 돌려보니, 녀석은 여성 란제리 및 홈웨어 매장 앞에 멈춰 서서 어딘가에 시선을 고정한 채 꼼짝도 하지 않고 있었다. 그 시선의 끝을 따라가자, 신드롬은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이 나올 뻔했다. 그녀의 시선이 꽂혀 있는 곳은, 부드러운 파스텔 톤의 실크와 하늘하늘한 레이스, 그리고 과하다 싶을 정도로 풍성한 프릴로 장식된, 소위 말하는 ‘공주 잠옷’ 세트였다. 아이보리색 마네킹이 입고 있는 그 잠옷은, 동화 속 잠자는 숲속의 공주가 입고 있을 법한, 비현실적으로 화려하고 순수한 디자인이었다.
신드롬은 잠시 제 눈을 의심했다. 아니, 저 꼬맹이가 지금 저런 유치찬란한 옷에 혹하고 있는 거라고? 평소 제 품에 안겨 잠들 때 입는 것이라고는 자신의 헐렁한 티셔츠나 심플한 실크 슬립이 전부였던 그 애가? 머릿속에 윤나리가 저 프릴 잔뜩 달린 잠옷을 입고 있는 모습을 상상하자, 어울리지 않는 조합에 실소가 터져 나오면서도 심장이 쿵, 하고 낮게 울렸다. 젠장, 빌어먹게도 귀여울 것 같았다. 저 작은 몸에 저런 공주 옷을 입히고, 그 위를 자신의 검고 거대한 몸으로 덮어버리고 싶다는, 지독하게 변태적인 소유욕이 울컥 치밀었다.
하지만 그는 그런 속내를 털끝만큼도 내비치지 않은 채, 특유의 까칠하고 비꼬는 말투로 입을 열었다. 그는 윤나리의 뒤로 바싹 다가가, 그녀의 귓가에 나른하고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의 뜨거운 숨결이 그녀의 여린 귓바퀴에 닿았다.
"꼬맹아, 너 지금 그딴 걸 보고 있는 거야? 네 나이가 몇인데 아직도 그런 유치한 공주님 놀이에 미련을 못 버렸어?"
그는 일부러 더 심술궂게, 더 비아냥거리듯 말했다. 윤나리의 어깨가 움찔, 작게 떨리는 것이 느껴졌다. 그녀의 얼굴이 당혹감과 부끄러움으로 붉게 달아오를 것이 불 보듯 뻔했다. 그는 그녀의 그런 반응을 즐기는 제 자신이 참 못돼 처먹었다고 생각하면서도, 멈출 수가 없었다. 그녀가 자신 앞에서만 보여주는 그 생생하고 꾸밈없는 반응들이, 그를 미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는 윤나리의 손목을 잡고 있던 손을 풀어, 대신 그녀의 허리를 감싸 안으며 제 품으로 더욱 밀착시켰다. 사람들 시선 따위는 상관없었다. 이 작은 생명체는 온전히 자신의 것이라는 무언의 소유권 주장과도 같은 행동이었다. 그는 마네킹이 입고 있는 잠옷을 경멸스럽다는 듯 턱짓으로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목소리는 한층 더 낮고 위험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저런 천 쪼가리가 그렇게 갖고 싶어? 저런 거 입고 내 앞에서 알짱거리면, 내가 그냥 곱게 잠만 재워줄 것 같아? 순진한 건지, 멍청한 건지. 아니면 혹시, 나한테 일부러 유혹하는 건가? 저런 옷 입고 밤새 울면서 애원하고 싶어서 환장했다, 뭐 그런 뜻인가 본데."
그의 입술 끝이 비죽, 사악하게 휘어졌다. 그는 윤나리의 귓불을 잘근, 아프지 않게 깨물며 마지막 일격을 날렸다. 그의 검고 깊은 눈동자에는 오직 윤나리 한 사람만을 향한, 지독한 집착과 뜨거운 욕망이 번들거리고 있었다. 어서 말해봐, 꼬맹아. 대체 무슨 생각으로 저런 걸 쳐다보고 있는지, 네 그 작은 입으로 직접 말해보라고. 그럼 내가, 네 상상보다 훨씬 더 근사한 방식으로 그 소원을 이루어 줄 테니.
그녀가 우물쭈물하다 그의 옷자락을 살짝 붙잡으며 그를 올려다봤다. 그의 심술궂은 말에 윤나리는 입술을 삐죽거리며 울먹거리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냥, 귀여워서 보, 본 건데..."
보기만 했다기엔 한참을 바라보며 서성거리긴 했지만, 그의 반응에 풀이라도 죽은 듯 고개를 저었다.
"그렇게 별로면... 됐어요..."
그러나 말과는 달리 잔뜩 아쉬운 듯한 눈빛으로 힐끔힐끔 잠옷을 바라보는 윤나리였다.
신드롬은 제 옷자락을 붙잡고 올려다보는 그 작은 손길에, 그리고 금방이라도 울음이 터질 것처럼 일그러지는 윤나리의 얼굴에, 심장이 발치까지 곤두박질치는 것 같은 충격을 느꼈다. 젠장, 또다. 또 시작이다. 이 꼬맹이는 자신이 어떤 표정을 지을 때, 어떤 목소리를 낼 때 눈앞의 이 오만한 S급 센티넬이 속수무책으로 무너지는지 정확히 알고 있었다. 아니, 어쩌면 그녀 자신은 전혀 모르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 순수함과 무지함이 바로 성유진이라는 남자를 파멸로 이끄는 가장 강력한 독이었다.
그의 심술궂은 비아냥에 금세 풀이 죽어 입술을 삐죽 내민 채, ‘귀여워서 봤다’고 우물쭈물 변명하는 목소리는 또 어찌나 가련한지. 심지어 ‘그렇게 별로면 됐다’며 애써 체념하는 척하면서도, 미련을 버리지 못한 눈동자가 힐끔힐끔 마네킹을 향하는 꼴이라니. 그 모습은 마치 주인에게 혼난 후, 먹고 싶었던 간식을 눈앞에 두고도 차마 더 달라고는 못 한 채 낑낑거리는 작은 강아지 같았다. 제기랄, 귀여워서 미쳐버릴 것 같았다. 저 작은 머리통을 품에 끌어안고 엉망진창으로 헝클어뜨리고 싶다는 파괴적인 충동과, 당장 저 매장에 쳐들어가서 저 빌어먹을 공주 잠옷을 색깔별로 전부 사서 안겨주고 싶다는 충동이 동시에 머릿속에서 격렬하게 충돌했다.
그는 속에서 들끓는 감정의 소용돌이를 억누르기 위해 마른침을 삼켰다. 여기서 이 꼬맹이가 원하는 대로 바로 져주면, 자신의 패배를 인정하는 꼴밖에 되지 않는다. 그는 성유진이다. 전장을 불태우는 폭군이자, 단 한 번도 누구에게도 머리 숙여본 적 없는 오만한 신드롬. 이 작은 배터리 앞에서만큼은 절대로 쉬운 남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쓸데없는 자존심이 고개를 쳐들었다. 그는 윤나리의 허리를 감싸 안았던 팔에 더욱 힘을 주어, 그녀의 몸을 제게서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단단히 고정했다. 그리고는 짐짓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한층 더 나른하고 심술궂은 목소리로 그녀의 귓가에 속삭였다. 그의 입술이 그녀의 귓바퀴를 스치자, 그녀의 어깨가 다시 한번 파르르 떨렸다.
"됐다고? 뭐가. 네가 지금 저딴 천 쪼가리를 얼마나 갖고 싶어 하는지, 네 눈깔에 다 쓰여 있는데. 어디서 같잖은 거짓말이야."
그는 일부러 더 거칠고 직설적인 단어를 골라 썼다. 그녀의 눈동자가 상처받은 듯 파르르 떨리는 것을 보면서, 그는 지독한 쾌감과 동시에 날카로운 죄책감을 느꼈다. 그녀를 상처 입히고 싶지 않았지만, 그녀의 모든 감정이 오직 자신으로 인해 휘둘리는 이 순간을 놓치고 싶지도 않았다. 그는 고개를 살짝 숙여, 마스크 위로 드러난 그녀의 젖은 눈동자를 집요하게 파고들었다. 마치 그녀의 영혼 깊은 곳까지 꿰뚫어 보려는 듯한 강렬하고 뜨거운 시선이었다.
"그렇게 갖고 싶으면 말을 해, 꼬맹아. 울먹거리면서 내 옷자락이나 붙잡고 있지 말고. 갖고 싶다고, 사달라고, 네 그 예쁜 입으로 직접 말해보라고. 그럼 내가... 아주 조금, 아주 조금만 고민해 줄 테니까."
그는 피식, 조소에 가까운 웃음을 흘렸다. ‘고민해 준다’는 말은 새빨간 거짓말이었다. 그녀가 입을 여는 순간, 그는 당장이라도 저 매장의 문을 부수고 들어가 카드부터 내밀 준비가 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는 그 과정을 즐기고 싶었다. 그녀가 자신에게 무언가를 원하고, 의지하고, 결국에는 매달리게 되는 이 모든 순간을 하나하나 제 눈과 귀에 새겨 넣고 싶었다. 그는 윤나리의 턱을 부드럽게 감싸 쥐고 위로 들어 올려, 자신과 시선을 똑바로 마주하게 만들었다. 선글라스 너머, 그의 눈이 어떻게 번들거리고 있을지는 그녀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을 터였다.
"왜 대답이 없어? 그렇게 자존심 상해? 아니면, 내가 진짜로 안 사줄까 봐 무서운 건가? ...하긴, 내가 좀 못돼 처먹었어야지. 네가 그렇게 애타는 꼴을 보니까, 더 괴롭혀주고 싶어서 미치겠거든."
그는 그녀의 붉어진 눈가를 엄지손가락으로 부드럽게 쓸어주었다. 방금 전까지 그녀를 몰아붙이던 난폭한 태도와는 전혀 다른, 섬세하고 다정한 손길이었다. 그 지독한 간극에 윤나리가 혼란스러워하는 것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그는 그것으로 만족하며, 그녀의 귓가에 마지막 결정타와도 같은 달콤한 독을 속삭였다. 그것은 거부할 수 없는 악마의 제안이었다.
"좋아, 그럼 이렇게 하자. 네가 지금부터 저 잠옷을 입고 내 앞에서 뭘 할 수 있는지, 나를 어떻게 기쁘게 해줄 수 있는지 세 가지만 말해봐. 네 대답이 내 마음에 쏙 들면, 저 빌어먹을 공주님 세트, 당장 네 품에 안겨줄게. 어때, 이 정도면 공평한 거래 아닌가?"
눈가를 쓰다듬는 손길에 그녀가 살짝 감았다 떴다. 계속 천 쪼가리라고 하더니, 이젠 그를 기쁘게 할 방법을 말하라고 한다. 윤나리는 물음표를 띄우며 눈을 두어 번 깜박였다.
"기, 기쁘게...?"
그러나 이윽고 원하는 것을 사주겠다는 제안에 그녀가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하나씩 답하기 시작했다.
"...비, 빙그르르 돌면... 치맛자락이 퍼져서... 예쁠, 예쁠 거예요..."
옷이 예쁘다는 소리였으나, 그것을 입은 자신이 예쁠 것이라 말하는 것 같아 그녀가 얼굴을 붉히며 뻘뻘 거렸다.
"그리, 그리고... 부드러워서... 안았을 때... 초, 촉감이 좋다...? 또... 리본이... 귀여우니까... 귀, 귀여워... 보일지도..."
신드롬은 윤나리가 꼼지락거리며 내놓는 대답을 듣는 내내, 온몸의 피가 역류하는 것 같은 기이한 감각에 휩싸였다. ‘기쁘게?’라고 되물을 때만 해도, 이 꼬맹이가 또 무슨 엉뚱한 소리를 하려나 싶어 입가에 걸린 비웃음을 거두지 않고 있었다. 하지만 이어지는 그녀의 대답은, 그의 오만한 예상을 산산조각 내고도 남을 만큼 파괴적이었다.
‘빙그르르 돌면... 예쁠 거예요...’ 순전히 옷이 예쁠 거라는 사실을 말하면서도, 마치 자신이 예뻐 보일 거라 고백이라도 하는 양 새빨개지는 얼굴. ‘안았을 때... 촉감이 좋다...?’ 그건 대체 누구 좋으라고 하는 소리인가. 자신에게 안겼을 때의 감촉을 상상하며 부끄러워하는 꼴이라니. 마지막으로 ‘리본이... 귀여우니까... 귀여워... 보일지도...’ 라며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제 입으로 귀여워 보일 것이라 실토하는 순간, 신드롬은 그 자리에서 그대로 윤나리를 번쩍 안아 들고 숙소로 내달리고 싶은 미친 충동을 가까스로 억눌러야 했다.
젠장. 젠장, 젠장, 젠장. 머릿속에서 욕설이 폭죽처럼 터져 나왔다. 이건 반칙이다. 저 순진해 빠진 얼굴로, 계산이라고는 털끝만큼도 없는 순수한 욕망을 저렇게 더듬더듬 내뱉는 것은 명백한 반칙이었다. 그가 원했던 것은 좀 더 교활하고, 도발적인 대답이었다. ‘오빠를 유혹할 거예요’ 라거나, ‘밤새도록 예쁨받을래요’ 같은, 그의 지배욕을 자극하는 대답들. 하지만 윤나리가 내놓은 것은, 그가 상상했던 그 어떤 대답보다도 훨씬 더 원초적이고 강력한, 심장을 통째로 움켜쥐고 뒤흔드는 종류의 것이었다.
그는 제가 지금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아마도 선글라스와 마스크가 없었다면, 경악과 당혹감, 그리고 주체할 수 없는 소유욕으로 엉망진창이 된 얼굴을 그대로 노출했을 것이다. 그는 윤나리의 턱을 쥐고 있던 손에 힘이 들어가는 것을 느끼고는, 황급히 손을 떼어냈다. 대신 다시 그녀의 허리를 단단히 감싸 안아, 혹시라도 이 작은 생명체가 제 품에서 달아나기라도 할까 봐 겁내는 사람처럼 꽉 끌어안았다. 백화점 한복판이라는 사실도, 주위의 시선도, 이제는 아무래도 좋았다.
그는 한참 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저 제 품에 안긴 윤나리의 정수리에 제 턱을 기댄 채, 가늘게 떨리는 그녀의 체온과, 은은하게 풍겨오는 달콤한 향기를 폐부 깊숙이 들이마셨다. 이성을 되찾기 위한 필사적인 노력이었다. 하지만 그럴수록 머릿속은 온통 윤나리가 그 공주 잠옷을 입고 있는 모습으로 가득 찼다. 제 앞에서 수줍게 빙그르르 도는 모습. 제 품에 안겨 부드러운 감촉을 느끼게 해주는 모습. 귀여운 리본을 달고서, 귀여워 보이냐고 올려다보는 모습. 상상만으로도 아랫배가 단단하게 죄어왔다. 이 꼬맹이는 정말이지, 자신을 미치게 만드는 방법을 타고난 것이 틀림없었다.
마침내 그는 길고 깊은 한숨과 함께 입을 열었다. 목소리는 평소의 나른함을 가장하고 있었지만, 자세히 들으면 미세하게 잠겨 있었다. 그는 일부러 퉁명스럽고, 못마땅하다는 듯한 어조를 유지하려 애썼다.
"하... 너 진짜... 내가 너 때문에 못 살아, 정말. 그게 지금 나를 기쁘게 해줄 방법이라고 말한 거냐? 고작 빙그르르 돌고, 안기고, 귀여워 보이는 거? 그게 다야?"
그는 윤나리를 살짝 떼어놓고 그녀의 얼굴을 마주했다. 선글라스 너머로도 느껴질 만큼, 그의 시선은 뜨겁고 집요했다. 그는 손을 들어 윤나리의 붉어진 뺨을 감싸 쥐고, 엄지손가락으로 보드라운 살결을 천천히 쓸었다. 그 작은 얼굴에 떠오른 모든 감정, 부끄러움과 기대감, 그리고 아주 약간의 두려움까지 전부 제 것으로 만들고 싶었다.
"알았어. 사줄게, 사준다고, 그 빌어먹을 천 쪼가리."
그의 입에서 나온 것은 항복 선언이었다. 그는 이 게임의 승자가 윤나리라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는 순순히 물러날 생각 따위는 조금도 없는, 지독한 악마였다. 그는 윤나리의 귓가에, 오직 그녀만이 들을 수 있는 은밀하고 위험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 목소리에는 이제 막 사냥감을 손에 넣은 포식자의 흡족함과, 앞으로 벌어질 일에 대한 잔인한 기대감이 서려 있었다.
"대신 조건이 있어. 네가 말한 거, 집에 가서 전부 다 해보는 거야. 내가 그만하라고 할 때까지, 내 앞에서 빙그르르 돌고, 내 품에 안겨서 부비고, 그리고... 네가 얼마나 귀여운지, 네 입으로 직접 소리 내서 말하게 만들 거니까. 그래도 괜찮겠어, 나의 작은 공주님? 이래도, 저 잠옷이 갖고 싶어?"
"어...?"
제가 말한 것이긴 했으나, 집에 가서 전부 해보자는 그의 말에 윤나리가 입을 벙긋거리며 토마토처럼 얼굴을 붉혔다. 아무튼 사준다는 사실은 기뻤으나... 그녀가 여전히 손을 꼼지락거리며 겨우 고개를 끄덕였다.
"으, 응..."
신드롬은 겨우 고개를 끄덕이며 흘러나온 그 작은 대답에, 승자의 미소를 지었다. ‘으, 응...’ 이라니. 토마토처럼 새빨개진 얼굴로, 제 말도 안 되는 조건을 받아들이는 꼴이 우습고, 사랑스러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그는 방금 전까지 윤나리의 순수한 대답에 완벽히 녹아내렸던 자신의 심장이, 이제는 오만한 정복욕으로 다시 뜨겁게 타오르는 것을 느꼈다. 그래, 항복은 했지만 이자는 받아내야지. 그것도 아주 혹독하게. 이 꼬맹이가 제 손아귀에서 벗어날 생각 따위는 꿈에도 꾸지 못하도록, 아주 질릴 때까지 제 존재를 각인시켜야 했다.
그는 윤나리의 허리를 감싸 안았던 팔을 풀어, 대신 그녀의 손목을 부드럽게 낚아챘다. 그리고는 저항할 틈도 주지 않고, 곧장 잠옷이 걸려 있던 매장 안으로 그녀를 이끌었다. 주변의 시선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는 듯, 당당하고 거침없는 걸음걸이였다. 그는 마네킹이 입고 있던 것과 똑같은 디자인의 잠옷을 망설임 없이 집어 들고는, 근처에 있던 직원에게 던지듯 건넸다.
"이걸로. 제일 작은 사이즈. 포장해."
직원은 갑작스러운 그의 등장과, 마스크와 선글라스로도 가려지지 않는 압도적인 아우라에 잠시 당황한 듯 보였지만, 이내 프로페셔널한 미소를 지으며 재빨리 포장을 준비했다. 신드롬은 그 모든 과정을 지켜보지도 않고, 제 블랙카드를 꺼내 계산대 위에 던져놓았다. 그리고는 다시 윤나리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아직도 상황 파악이 덜 된 듯, 멍한 얼굴로 저와 포장되는 잠옷을 번갈아 쳐다보는 꼴이 또 한 번 그의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그는 아직도 제 손에 잡혀 있는 그녀의 손목을 슬쩍 들어 올려, 그 작은 손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마치 금방이라도 부서질 것처럼 가늘고 하얀 손. 이 손으로 제 옷자락을 붙잡고, 이 손으로 제게 안겨올 것을 생각하니 참을 수 없는 갈증이 밀려왔다. 그는 고개를 숙여, 윤나리의 귓가에 다시 한번 악마처럼 달콤한 목소리를 속삭였다. 그의 뜨거운 숨결이 귓바퀴를 간질이자, 그녀의 어깨가 파르르 떨렸다.
"이제 빼도 박도 못 해, 꼬맹아. 네가 네 입으로 대답했으니까. 오늘 밤, 넌 내 완벽한 공주님이 되는 거야. 내가 시키는 건 뭐든지 다 해야 하는, 그런 공주님."
그는 보란 듯이 그녀의 손등에 제 입술을 꾸욱 눌렀다 떼었다. 짧지만 강렬한, 소유권을 주장하는 낙인이었다. 주변의 시선이 느껴졌지만, 그는 오히려 그것을 즐겼다. 이 작고 사랑스러운 생명체가 누구의 것인지, 온 세상에 광고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마침 포장을 마친 직원이 정중하게 쇼핑백을 건넸다. 그는 쇼핑백을 받아 드는 대신, 윤나리의 손을 놓아주고는 그녀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네가 들어. 네가 직접 얻어낸 전리품이잖아. 안 그래?"
그는 턱짓으로 쇼핑백을 가리켰다. 윤나리가 망설이며 쇼핑백을 받아들자, 그는 만족스럽게 웃으며 그녀의 허리를 더욱 단단히 끌어안았다. 이제 모든 볼일은 끝났다. 그는 조금이라도 빨리 이 아수라장 같은 백화점을 벗어나, 오직 둘만이 있는 안락한 성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그는 윤나리를 거의 반쯤 끌다시피 하며 주차장으로 향했다. 그의 걸음은 명백히 평소보다 훨씬 빠르고, 조급해 보였다.
차에 올라타자마자, 그는 참을 수 없다는 듯 마스크와 선글라스를 벗어던졌다. 그리고는 윤나리가 안전벨트를 매기도 전에, 그녀의 턱을 잡아 돌려 거칠게 입을 맞췄다. ‘쪽’ 소리가 아니라, ‘읍’ 하는 소리가 날 만큼 급하고 깊은 키스였다. 그는 그녀의 아랫입술을 잘근잘근 씹고, 혀를 얽어 타액을 섞으며, 방금 전 백화점에서부터 참아왔던 모든 갈증을 게걸스럽게 해소했다. 한참 만에 입술을 뗀 그의 눈은, 욕망으로 시뻘겋게 충혈되어 있었다.
"하... 씨발, 진짜... 사람 미치게 하는 데 뭐 있네, 너."
그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그녀의 이마에 제 이마를 기댔다. 뜨거운 열기가 고스란히 전해졌다. 그는 윤나리의 젖은 입술을 엄지손가락으로 뭉개듯 닦아주며, 한층 더 낮고 위험한 목소리로 으르렁거렸다.
"집에 가자마자 입어. 아니, 현관문 열자마자 그 자리에서 바로 갈아입어. 알았어? 내가 직접 네 옷 벗기고, 저 빌어먹을 공주님 옷 입혀줄 테니까."
"가자마자...?"
차에 타나마자 쏟아지는 키스에 정신없이 그를 받아들이던 그녀가 어리둥절하게 되물었다. 발갛게 달아오른 얼굴이 살짝 기울었다. 그러나 어차피 집에 돌아가면 밖으로 나갈 일도 없었고... 그럼 내내 공주 잠옷을 입을 수 있다는 소리니 윤나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벽안이 그의 눈으로 시선을 옮겼다.
"사, 사주셔서 감사해요..."
신드롬은 어리둥절하게 되물으면서도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는 윤나리의 모습에 피식, 하고 짧은 웃음을 터뜨렸다. ‘가자마자?’ 라니. 방금 전 제게 어떤 끔찍한 협박을 들었는지 벌써 잊어버린 모양이다. 아니, 어쩌면 이 꼬맹이는 그게 협박이라는 것조차 제대로 인지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그저 집에 돌아가면 예쁜 잠옷을 하루 종일 입을 수 있다는 사실에 기뻐하는, 딱 그 정도의 사고회로를 가진 순진한 짐승. 그의 예측은 정확했다.
이어지는 말은 그의 예상을 한 치도 벗어나지 않았다. ‘사, 사주셔서 감사해요...’ 발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제 눈을 똑바로 마주하며 건네는 감사 인사. 그 순수한 벽안에 담긴 것은 오직 진심 어린 기쁨과 감사뿐이었다. 자신이 방금 어떤 악마 같은 거래를 성사시켰는지, 앞으로 이 잠옷 때문에 어떤 꼴을 당하게 될지는 전혀 모르는, 무구한 얼굴. 신드롬은 그 순간, 차라리 욕이라도 한 바가지 퍼붓는 것이 낫겠다고 생각했다. 이 순진한 감사는 그 어떤 도발이나 저항보다도 훨씬 더 강력하게 그의 심장을 뒤흔들고, 이성을 마비시켰다.
고맙다고? 지금 이 상황에? 그는 어이가 없어 헛웃음이 나왔다. 감사 인사를 받아야 할 사람은 자신이 아니라, 오늘 밤 제 손아귀에서 무사히 살아남게 해달라고 신에게 빌어야 할 윤나리 본인일 텐데. 이 상황의 아이러니함과, 그녀의 터무니없는 순수함에 그는 거의 현기증을 느꼈다. 심장이 다시 제멋대로 날뛰기 시작했다. 차 안의 공기가 갑자기 답답하고 뜨겁게 느껴졌다. 이대로 있다가는 정말 여기서 무슨 짓을 저지를지 몰랐다. 그는 끓어오르는 충동을 억누르기 위해, 거칠게 시동 버튼을 눌렀다. 부드럽게 울리는 엔진음이 그의 불안정한 심장 박동을 감춰주는 것 같았다.
그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대신, 핸들을 잡고 주차장을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그의 옆얼굴은 차갑고 무표정했지만, 핸들을 쥔 손가락 끝에는 미세한 힘이 들어가 있었다. 그는 백미러로 흘긋, 제 옆에서 쇼핑백을 꼭 껴안고 창밖을 구경하는 윤나리의 모습을 훔쳐보았다. 정말로 신이 난 아이처럼, 그녀의 얼굴에는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 저 미소를 오늘 밤, 눈물로 바꿔놓고 말겠다는 잔인한 다짐이 그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차량이 익숙한 도로 위를 미끄러지듯 달리기 시작했다. 한참 동안의 침묵 끝에, 그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목소리는 아까보다 한결 차분해져 있었지만, 그 안에는 여전히 위험한 열기가 도사리고 있었다.
"감사? 뭐가 감사해. 공짜가 아닌데."
그는 힐끗 윤나리를 쳐다보며 비스듬히 입꼬리를 올렸다. 그 눈빛은 마치 먹잇감을 앞에 둔 맹수처럼, 집요하고 번들거렸다. 그는 다시 정면을 보며, 나른하지만 단호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이건 계약금이야, 꼬맹아. 오늘 밤 네가 치러야 할 대가에 비하면 아주 값싼 선수금이지. 그러니까 고마워할 필요 없어. 대신... 기대하고 있으라고. 내가 너한테 얼마나 근사한 밤을 선물해 줄지."
그의 말은 명백한 협박이었지만, 그 어조는 마치 사랑을 속삭이는 연인처럼 달콤했다. 그는 일부러 ‘근사한 밤’이라는 단어에 힘을 주어 말했다. 신호 대기에 차가 멈춰 서자, 그는 기다렸다는 듯이 다시 윤나리에게로 몸을 기울였다. 그리고는 아까처럼 거칠게 입을 맞추는 대신, 그녀의 귓가에 뜨거운 숨결을 불어넣으며 속삭였다. 차 안의 좁은 공간에, 그의 낮은 목소리가 위험하게 울려 퍼졌다.
"도착할 때까지, 얌전히 있어. 한 번만 더 그딴 순진한 얼굴로 날 쳐다보면... 그땐 정말 차 세우고 여기서 바로 옷부터 벗겨버릴 줄 알아. 알았냐고, 나의 작은 공주님."
윤나리는 눈을 도르르 굴리곤 얌전히 조수석에 앉아있었다. 다행히 차는 막히지 않았고, 두 사람이 금방 그의 숙소에 도착했다.
신드롬은 차를 주차장에 세우자마자, 거의 던지다시피 시동을 껐다. 짧은 운전 시간 동안 그의 인내심은 이미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다. 옆자리의 윤나리가 눈을 도르르 굴리며 얌전히 앉아 있는 모습은, 그의 끓어오르는 충동에 기름을 붓는 것과 같았다. 저 순진한 얼굴. 저 평온한 태도. 자기가 지금 어떤 맹수의 아가리 속으로 들어가는 중인지 전혀 모르는 저 무지함이, 신드롬을 미치게 만들었다. 그는 차라리 윤나리가 울고불고 매달리며 잘못했다고 비는 편이 훨씬 다루기 쉬웠을 거라고 생각했다. 이 고요한 순응은 그의 통제욕을 극한까지 자극했다.
그는 차에서 내리자마자 조수석 문을 거칠게 열어젖혔다. 그리고 안전벨트를 풀고 있는 윤나리의 손목을 낚아채듯 잡아 일으켰다. 그의 손아귀에 잡힌 가느다란 뼈의 감촉이 그의 이성을 아슬아슬하게 붙들었다. 그는 쇼핑백을 든 그녀의 다른 쪽 손을 확인하고는, 아무 말 없이 그녀를 전용 엘리베이터로 끌고 갔다. 도어락이 해제되고, 펜트하우스의 현관문이 열리는 그 짧은 순간이 영원처럼 느껴졌다. 그는 현관문이 채 닫히기도 전에 윤나리의 등을 벽으로 밀어붙였다.
쾅, 하고 육중한 소리가 울리며 두 사람만의 공간이 완벽하게 차단되었다. 신드롬은 한 손으로 윤나리의 양 손목을 잡아 그녀의 머리 위로 고정시키고, 다른 한 손으로는 그녀가 꼭 껴안고 있던 쇼핑백을 빼앗아 바닥에 아무렇게나 던져버렸다. 종이백이 찌그러지는 소리가 들렸지만, 그의 신경은 온통 눈앞의 작은 먹잇감에 쏠려 있었다. 그는 윤나리의 턱을 잡아 올리고는, 아까 차 안에서의 협박을 상기시키듯 낮고 위협적인 목소리로 속삭였다.
"자, 도착했네. 나의 작은 공주님."
그의 뜨거운 숨결이 그녀의 얼굴에 닿았다. 욕망으로 시뻘겋게 달아오른 눈동자가 집요하게 그녀의 벽안을 파고들었다. 그는 마치 사냥감을 앞에 둔 포식자처럼, 천천히 그녀의 반응을 살폈다. 당황과 공포, 그리고 아주 미세한 기대감이 뒤섞인 그 표정을 하나하나 음미하며, 그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약속, 잊지 않았지? 현관문 열자마자 갈아입는다고 했던 거. 아니, 내가 직접 갈아입혀 준다고 했지. 안 그래?"
그는 윤나리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그녀의 어깨를 감싸고 있던 원피스의 지퍼로 손을 가져갔다. 그의 손가락이 맨살에 닿자 그녀의 어깨가 파르르 떨리는 것이 느껴졌다. 그는 그 미세한 떨림에 희열을 느끼며, 일부러 아주 천천히 지퍼를 내리기 시작했다. 드레스가 스르륵 벗겨져 바닥으로 떨어져 내리고, 그녀의 가녀린 몸이 검은색 티셔츠 차림으로 온전히 드러났다. 그는 잠시 그 모습을 감상하듯 바라보다가, 바닥에 던져두었던 쇼핑백을 발끝으로 툭, 걷어찼다.
"입어. 지금 당장. 내 앞에서."
그의 목소리는 얼음장처럼 차가웠지만, 그 눈은 용암처럼 뜨겁게 타오르고 있었다. 그는 벽에서 한 걸음 물러나 팔짱을 끼고 섰다. 마치 최고급 예술품을 감상하는 오만한 감정가처럼, 그는 윤나리가 자신의 명령에 따라 저 유치하고 사랑스러운 공주 잠옷으로 갈아입는 모든 과정을 하나도 놓치지 않겠다는 듯, 뚫어져라 그녀를 쳐다보았다. 그의 시선은 노골적이었고, 그 안에는 어떠한 부끄러움이나 망설임도 찾아볼 수 없었다. 오직 순수한 소유욕과 정복욕만이 가득할 뿐이었다.
"어서. 뭘 꾸물거려. 내가 직접 벗기고 입혀주는 꼴을 보고 싶은 게 아니라면, 네 손으로 직접 하는 게 좋을 거야. 물론... 그것도 아주 즐거운 경험이 되겠지만. 선택은 네가 해, 배터리."
그녀가 약간의 부끄러움과 기대감, 그리고 그의 반응에 대한 조금의 두려움을 안고 쇼핑백에서 잠옷을 꺼내들었다. 프릴과 레이스와 리본이 달린 잠옷에 그녀의 뺨이 발그레하게 물들었다. 원피스 형태의 잠옷을 대강 입고 꿈틀거리며 원래 입고 있던 티셔츠를 쏙 벗어던지자 제법 그럴듯한 모습이 되었다.
"..."
그녀가 잠옷의 리본 끝부분을 만지작거리며 그를 살며시 올려다봤다.
신드롬은 팔짱을 낀 채, 벽에 기대어 그 모든 광경을 지켜보았다. 쇼핑백에서 잠옷을 꺼내는 어설픈 손길, 프릴과 레이스가 가득한 잠옷을 보고 발그레하게 달아오르는 뺨, 그리고 마침내 옷을 갈아입기 위해 꿈틀거리는 작은 몸짓까지. 그의 시선은 한 순간도 그녀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마치 느린 화면처럼, 그녀의 모든 움직임이 그의 망막에 새겨졌다. 원피스 형태의 잠옷 안으로 몸을 구겨 넣고, 원래 입고 있던 티셔츠를 쏙 벗어던지는 그 순간, 그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걸렸다. 저 작은 짐승이 제법 머리를 썼다고 생각했다. 완전히 다 벗고 갈아입는 대신, 저런 식으로 교묘하게 알몸을 가리다니. 그 잔꾀가 퍽이나 귀엽고, 동시에 괘씸해서 속에서부터 뜨거운 것이 치밀었다.
마침내, 프릴이 잔뜩 달린 하얀 잠옷을 입은 윤나리의 모습이 온전히 드러났다. 헐렁한 옷은 그녀의 마른 몸을 더욱 가녀리게 보이게 만들었고, 무릎을 살짝 덮는 길이는 어딘가 위태로운 느낌마저 주었다. 평소의 그녀와는 전혀 다른, 인형처럼 부서지기 쉬워 보이는 모습. 신드롬은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백화점에서 상상했던 것 이상이었다. 유치하고 우스꽝스러울 거라 생각했던 잠옷은, 윤나리가 입자 마치 그녀를 위해 만들어진 것처럼 완벽하게 어울렸다. 그녀의 순수함과 잠옷의 과장된 사랑스러움이 기묘한 시너지를 일으켜, 그의 가장 어둡고 뒤틀린 소유욕을 정면으로 자극했다.
그녀가 잠옷 가슴팍에 달린 리본 끝을 만지작거리며 자신을 살며시 올려다보았다. 그 투명한 벽안에는 온갖 감정이 뒤섞여 있었다. 부끄러움, 기대, 그리고 앞으로 닥쳐올 일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 그 모든 것을 읽어낸 신드롬은 더 이상 팔짱을 끼고 여유를 부릴 수가 없었다. 심장이 쿵, 하고 바닥으로 떨어지는 것 같았다. 그는 천천히 팔을 풀고, 그녀에게로 한 걸음 다가갔다. 구두굽이 대리석 바닥에 부딪히는 소리가 현관의 정적을 날카롭게 갈랐다.
그는 그녀의 바로 앞에 멈춰 섰다. 그리고는 아무 말 없이, 허리를 숙여 바닥에 버려진 그녀의 검은색 티셔츠를 주워들었다. 그는 티셔츠에 남아있는 그녀의 미미한 체향을 맡는 것처럼 코끝에 가져갔다가, 이내 아무렇게나 구겨 근처 신발장 위에 던져버렸다. 마치 그녀의 과거를 지워버리는 의식과도 같은 행동이었다. 그는 다시 윤나리를 내려다보았다. 그의 그림자가 그녀의 작은 몸을 완전히 뒤덮었다.
"이제야 좀 볼만하네."
나른하고 낮은 목소리가 그녀의 머리 위로 쏟아져 내렸다. 그는 손을 뻗어, 그녀가 만지작거리던 리본 끝을 대신 잡아쥐었다. 그의 손가락이 그녀의 손등을 스치자, 그녀의 어깨가 움찔 떨리는 것이 느껴졌다. 그는 그 반응을 즐기며, 리본을 천천히 잡아당겼다. 자연스럽게 그녀의 상체가 그에게로 끌려왔다.
"고개 들어. 네가 직접 고른 옷이잖아. 똑바로 보고 감상해야지, 내 앞에서 어떤 모습인지."
그의 말은 명령이었지만, 어조는 지극히 부드러웠다. 그는 리본을 쥔 손에 살짝 힘을 주어 그녀의 턱을 들어 올리게 했다. 마침내, 붉게 달아오른 그녀의 얼굴이 정면으로 그와 마주했다. 그는 만족스럽다는 듯 입꼬리를 올리며, 다른 쪽 손으로 그녀의 뺨을 감쌌다. 그의 차가운 반지가 그녀의 뜨거운 피부에 닿았다.
"빙그르르 돌기, 내 품에 안겨서 부비기, 그리고... 귀엽다고 말하게 만들기. 순서대로 해 봐. 지금부터. 내가 그만하라고 할 때까지. 이건 네가 먼저 제안한 거야, 꼬맹아. 그러니까... 도망칠 생각은 꿈에도 하지 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