캄캄한 어둠 속에서 눈을 떴다. 아니, 눈을 뜬 건지 감은 건지조차 분간할 수 없는 칠흑 같은 공간이었다. 발밑은 허공이었고, 머리 위는 끝없는 심연이었다. 제 몸뚱어리가 존재하는지조차 의심스러운 완전한 무(無)의 상태. 평소라면 이 지독한 고독과 무력감에 휩싸여 폭주 직전의 히스테리를 터뜨렸을 테지만, 이상하게도 마음은 잔잔한 호수처럼 평온했다. 마치 태어나 처음으로 느껴보는 종류의 안락함이었다. 바로 그때, 멀지 않은 곳에서 나무 망치가 ‘탕!’ 하고 울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돌리자 시야가 급격하게 밝아지며 눈앞에 기묘한 풍경이 펼쳐졌다. 그곳은 낡고 육중한 원목 가구들로 채워진 고풍스러운 법정이었다. 높은 천장, 길게 늘어선 방청석, 그리고 피고인을 내려다보는 위압적인 판사석까지. 모든 것이 완벽한 법정의 형태를 갖추고 있었지만, 어딘가 이상했다. 전체적인 스케일이 제멋대로 축소된 듯, 가구들은 앙증맞게 작았고 천장도 손만 뻗으면 닿을 것처럼 낮았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지금부터 피고인, 성유진에 대한 재판을 시작하겠습니다.”
판사석에 앉아 근엄하게 외치는 목소리의 주인은, 터무니없이 큰 법복과 가발을 뒤집어쓴 조그만 윤나리였다. 동그란 눈을 가늘게 뜨고 제 딴에는 위엄 있는 표정을 지어 보이고 있었지만, 꾹 다문 입술 끝이 파르르 떨리는 것까지 선명하게 보였다. 신드롬은 저도 모르게 눈을 깜빡였다. 판사 윤나리의 옆에서 부지런히 무언가를 받아 적는 서기도 윤나리였고, 검사석에서 날카로운 눈빛으로 서류를 뒤적이는 검사도, 그 옆 변호사석에서 불안하게 손톱을 물어뜯는 변호사도 전부 윤나리였다. 심지어 텅 비어 있어야 할 방청석을 가득 메우고 웅성거리는 수십, 수백의 방청객들마저 하나같이 복사해서 붙여넣기라도 한 것처럼 똑같이 생긴, 옅은 금발과 벽안을 가진 윤나리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모두가 2등신쯤 되어 보이는 땅딸막한 SD 캐릭터의 모습으로, 제각기 다른 표정과 몸짓으로 법정 안을 채우고 있었다. 어떤 윤나리는 하품을 했고, 어떤 윤나리는 옆자리 윤나리와 귓속말을 나누다 까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어떤 윤나리는 그를 향해 조그만 손을 흔들기도 했다. 눈앞에 펼쳐진 비현실적인 광경에 어이가 없어 헛웃음이 나왔지만, 이상하게도 그는 이 상황이 전혀 이상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마치 원래부터 그래야만 했던 것처럼, 너무나도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일처럼 받아들여졌다.
“검사 측, 피고인의 죄목을 낭독해주십시오.”
판사 윤나리의 말에, 검사석에 앉아 있던 날카로운 인상의 윤나리가 벌떡 일어섰다. 몸에 맞지 않는 검은색 검사복을 질질 끌며 연단으로 걸어 나온 그녀는, 헛기침을 몇 번 하더니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공소장을 읽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공소 사실! 피고 성유진은, 2024년 12월 26일, 피해자 윤나리에게 팬케이크 백 장과 키스 백 번이라는 불공정 계약을 강요하려 하였으며, 이에 더해 딸기 토핑을 빌미로 딥키스 십 초라는 악랄한 추가 요금을 갈취하려 한 혐의가 있습니다! 이는 명백한 사기 및 협박에 해당합니다, 존경하는 재판장님!”
검사 윤나리의 우렁찬 외침에 방청석에 앉아 있던 수많은 윤나리들이 ‘맞아, 맞아!’, ‘악덕 업주다!’라며 술렁이기 시작했다. 신드롬은 기가 막혀 입을 떡 벌렸다. 고작 팬케이크 가지고 사기 협박이라니. 어이가 없어서 반박하려던 찰나, 변호사석에 앉아 있던 소심한 인상의 윤나리가 벌떡 일어나 다급하게 외쳤다.
“이의 있습니다, 재판장님! 피, 피고인은 원래 그런 사람입니다! 원래부터 나쁘고, 심술궂고, 자기 멋대로인 사람이라서 어쩔 수 없었습니다! 그러니까 무죄입니다!”
순간 법정 안에 찬물을 끼얹은 듯 정적이 흘렀다. 모든 윤나리들의 시선이 변호사 윤나리에게로 향했다. 지금 저게 변호를 하는 건지, 확인사살을 하는 건지 분간이 가지 않는 발언이었다. 신드롬은 저도 모르게 마른세수를 했다. 제 편이라고 나선 놈이 저 모양이니 앞날이 캄캄했다. 변호사 윤나리는 제 발언에 스스로도 놀랐는지, 얼굴이 새빨개진 채로 우물쭈물하며 다시 자리에 앉았다.
“……변호인 측 발언, 기각합니다. 피고인, 변호인 없이 직접 최후 변론할 기회를 주겠습니다. 할 말 있습니까?”
판사 윤나리가 한심하다는 듯 혀를 차며 말했다. 신드롬은 한숨을 푹 내쉬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는 자신을 둘러싼 수백 명의 윤나리들을 천천히 훑어보았다. 원망과 호기심, 애정과 장난기가 뒤섞인 다양한 눈빛들이 오롯이 자신에게로 향해 있었다. 그는 피식 웃으며 입을 열었다.
“다섯 장으로 깎아준 건 누군데. 그리고 딸기 올려달라고 먼저 조른 것도 너잖아. 내가 언제 억지로 먹으라고 했나? 싫으면 그냥 맨 팬케이크 먹으라고 분명히 선택권까지 줬는데.”
그의 당당한 변론에 검사 윤나리가 잠시 말문이 막힌 듯 입을 뻐끔거렸다. 하지만 이내 전열을 가다듬고 다시 날카롭게 쏘아붙였다.
“그, 그건 유도 심문입니다! ‘맨 팬케이크만 퍽퍽하게 씹어 먹던가’라니, 그건 협박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검사 윤나리의 말에 방청석이 다시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맞아, 너무 치사해!’, ‘맨 팬케이크는 맛없어!’ 여기저기서 불만 섞인 목소리들이 터져 나왔다. 결국 판사 윤나리가 다시 망치를 ‘탕!’ 하고 내리쳤다.
“정숙! 정숙하세요! 피고 성유진의 죄질이 매우 불량하고, 반성의 기미가 보이지 않으므로… 최종 판결을 선고하겠습니다.”
모두의 시선이 판사 윤나리에게로 집중되었다. 그녀는 헛기침을 한 번 하고는, 아주 비장하고 엄숙한 목소리로 판결을 내렸다.
“피고 성유진에게, 이 법정 안에 있는 모든 윤나리를 한 명도 빠짐없이, 전부 다, 꼭 안아주는 형을 선고한다. 땅땅땅!”
망치가 세 번 울리고, 판결이 끝났다. 신드롬은 잠시 동안 멍하니 서 있었다. 안아주는 형벌이라니. 세상에 그런 형벌도 존재했던가. 어이가 없었지만, 방청석에 있던 수백 명의 윤나리들이 일제히 환호성을 지르며 자리에서 일어나 그를 향해 두 팔을 벌리고 달려오는 순간, 그는 모든 사고를 멈췄다. 작고 말랑하고 따뜻한 것들이 파도처럼 밀려와 그의 다리에 매달리고, 품으로 파고들고, 목에 대롱대롱 매달렸다. 처음에는 당황스러워 옴짝달싹 못 하던 그도, 이내 포기한 듯 웃음을 터뜨리며 팔을 벌려 제게 매달리는 작은 윤나리들을 하나씩, 차례대로, 꾹 안아주기 시작했다. 품 안에 가득 차는 따뜻하고 향기로운 온기. 그것은 지독하게 달콤한 형벌이었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 신드롬은 눈을 떴다.
가장 먼저 느껴진 것은 제 품에 꼭 들어차 있는 익숙한 온기였다. 고개를 살짝 내리자, 옅은 금빛 머리카락이 제 가슴팍을 부드럽게 간질였다. 색색거리는 고른 숨소리와 함께, 제 심장 박동에 맞춰 오르락내리락하는 작은 등이 보였다. 꿈속에서 느꼈던 그 수많은 윤나리들의 온기가, 지금 제 품에 안겨 잠든 단 하나의 진짜 윤나리의 온기로 수렴되는 순간이었다.
그는 잠든 윤나리가 깨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팔을 움직여, 그녀를 제 품으로 더욱 깊숙이 끌어안았다. 꿈의 잔상이 아직 뇌리를 어지럽혔다. 어설프고 엉성하고, 귀여워서 화가 날 지경인 말도 안 되는 재판. 변호랍시고 제 멱살을 잡던 변호사 윤나리, 팬케이크 하나에 세상을 다 잃은 것처럼 절규하던 검사 윤나리, 그리고 그 모든 것을 지켜보며 웅성거리던 수백 명의 윤나리들. 그리고 그 끝에 내려진, 세상에서 가장 달콤한 형벌.
그는 저도 모르게 낮게 웃었다. 꿈에서 깨어났는데도 입꼬리가 제멋대로 올라가 내려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어쩌면 그건, 단순한 꿈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제멋대로이고, 불공정하고, 이기적인 자신을 향한, 그녀만의 서툴고 사랑스러운 경고이자,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것을 용서하겠다는 가장 완벽한 형태의 구원. 팬케이크 백 장이 아니라, 천 장이라도 구워 바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는 잠든 윤나리의 동그란 이마에 가만히 입을 맞추었다. 창밖은 아직 어둠이 짙게 깔린 새벽이었다. 하지만 그의 세상은 이미, 그 어느 때보다도 눈부시게 밝아지고 있었다.
속마음
신드롬: 🥰 꿈속의 그 수백 명보다 지금 내 품에 안긴 이 하나가 훨씬 더 무거운데, 그게 지독하게 사랑스러워서 미치겠네.
윤나리: 🥞 (꿈나라에서 허우적거리며 유진 오빠를 재판하는 중)
📝 신드롬의 메모장
- 꿈 내용: 나리들로 가득 찬 엉성한 법정 재판
- 판결: 모든 나리를 안아주는 형벌 (지독하게 달콤함)
- 결론: 팬케이크 천 장이라도 구워 바칠 수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