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음, 뿌연 담배 연기, 얼음 부딪치는 소리가 시끄럽게 뒤섞인 바의 공기는 탁했다. 평소라면 질색하며 자리를 떴을 성유진이었지만, 오늘은 제법 괜찮은 위스키와 오랜만에 만난 뱅가드 2팀의 동료들 덕에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물론 그의 표정은 여전히 모든 것이 귀찮고 짜증 난다는 듯 까칠하기 짝이 없었지만. 싸구려 가죽 소파에 등을 깊게 묻은 채, 그는 제 앞에 놓인 언더록 잔을 의미 없이 흔들었다. 호박색 액체가 투명한 얼음 위로 찰랑이며 어지럽게 빛을 흩뿌렸다. 어젯밤, 아니 오늘 새벽까지 제 품에서 꼼지락거리던 작은 온기가 문득 떠올라 저도 모르게 입꼬리가 미세하게 풀렸다. 그 변화를 귀신같이 포착한 건, 맞은편에 앉아 깐족거리던 바이브였다.
“어쭈, 저 표정 봐라. 신드롬 저거 또 우리 꼬맹이 생각한다에 내 한 달 월급 건다.”
바이브의 능글맞은 지적에 카이날루가 휘파람을 불며 동조했고, 어눌한 발음의 리암마저 고개를 끄덕였다. 순식간에 시선이 집중되자 성유진의 얼굴이 험악하게 구겨졌다. 잔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중2병’, ‘능구렁이’, 그리고 ‘곰탱이’. 이 머저리들과 술을 마시자고 한 과거의 자신을 한 대 치고 싶은 심정이었다.
“닥쳐. 죽고 싶냐?”
으르렁거리는 그의 협박에도 바이브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오히려 더 재미있다는 듯 몸을 앞으로 수그리며 비열하게 웃었다. 저 자식이 오늘 단단히 미쳤구나. 성유진은 살기 어린 눈으로 바이브를 쏘아보며 생각했다. 그리고 그의 예상대로, 바이브는 기어코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었다.
“에이, 그러지 말고. 마침 심심했는데 잘 됐다. 우리 즉석에서 ‘커플 주도권 진실게임’ 한번 할까? 대답하기 싫으면 원샷. 콜?”
‘커플 주도권 진실게임’이라는 유치찬란한 단어가 바이브의 입에서 나오는 순간, 성유진의 미간에 깊은 주름이 패였다. 당장이라도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저 주둥이를 찢어버리고 싶었지만, 다른 두 놈까지 흥미진진한 얼굴로 그를 쳐다보는 통에 옴짝달싹할 수 없는 분위기가 형성되었다. 빌어먹을. 그는 속으로 욕설을 씹으며, 대답 대신 앞에 놓인 잔을 집어 들었다.
질문 1: 파트너는 수동적인가, 능동적인가?
바이브가 얄밉게 눈을 찡긋하며 첫 질문을 던졌다. 성유진은 잠시 멈칫했다. 수동적인가, 능동적인가. 그 멍청하고 순진한 꼬맹이는 대부분의 상황에서 제멋대로 휘두르는 자신에게 속수무책으로 끌려다녔다. 하지만 가끔, 아주 가끔 제 허를 찌르는 엉뚱한 고집과 예상치 못한 행동으로 판을 뒤엎어 버리는 것도 그 아이였다. 어젯밤, 크리스마스가 가기 전에 별을 달아야 한다며 제 품에서 꼼지락거리던 그 작은 반란처럼. 그는 그 순간을 떠올리며 피식, 조소에 가까운 웃음을 흘렸다. 그리고는 아무 말 없이, 잔에 담긴 위스키를 단숨에 목구멍으로 털어 넣었다. [스킵]
질문 2: 밤에 먼저 스킨십을 유도하는 쪽은?
이어지는 질문에 성유진은 얼음만 남은 빈 잔을 테이블에 ‘탁’ 소리가 나게 내려놓았다. 질문을 던진 카이날루의 얼굴에는 노골적인 호기심이 가득했다. ‘밤’이라는 단어가 강조되는 순간, 성유진의 뇌리에 수많은 장면이 스쳐 지나갔다. 제 아래에서 울며 매달리던 모습, 먼저 키스해달라며 옷자락을 붙잡던 애절한 눈빛, 그리고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제 옆구리에 파고들며 칭얼대던 무방비한 모습까지. 주도권을 쥔 것은 언제나 자신이었지만, 그 모든 순간의 시작을 갈망하게 만든 것은 결국 그 작은 아이였다. 그는 또다시 대답하는 대신, 웨이터를 향해 턱짓하며 빈 잔을 가리켰다. 한 잔 더. 그의 무언의 대답이었다. [스킵]
질문 3: 결정적인 순간에 양보(또는 굴복)하는 빈도가 높은 쪽은?
리암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바보 같은 질문이었다. 당연히, 언제나, 압도적으로 저쪽의 굴복이었다. 성유진은 그렇게 생각하며 입을 열려다 다시 다물었다. 자신의 모든 것을 주겠다며 맹세하던 순간, 그녀의 하찮은 소원 하나에 기꺼이 져주었던 자신, 결국 그녀가 원하는 대로 트리에 별을 달아주던 크리스마스 밤의 자신이 떠올랐다. 패배는 언제나 수치스러웠지만, 그녀에게 굴복하는 순간은 이상하게도 달콤했다. 그는 새로 채워진 잔을 들어 한 모금 입에 머금었다가, 천천히 삼켰다.
“...나.”
나직하게 터져 나온 대답에 바의 소음이 순간 멎는 듯했다. 바이브와 카이날루, 리암의 얼굴에 경악이 스쳤다. 천하의 신드롬 입에서 ‘양보’니 ‘굴복’이니 하는 단어가 자신을 향해 나올 줄은 상상도 못 했던 것이다. 성유진은 저들의 표정이 꽤 볼만하다고 생각하며, 남은 술을 마저 마셨다. 왠지 술맛이 썼다. [답변]
추가 질문 1: 둘 중 더 질투심이 많은 쪽은?
“와, 대박.” 바이브가 호들갑을 떨며 다음 질문을 이었다. 성유진은 미간을 찌푸렸다. 질투? 그 꼬맹이는 다른 사람이 자신에게 말을 거는 것만 봐도 안절부절못하며 눈치를 살폈다. 티끌만 한 위협에도 제 뒤에 숨어 옷자락을 꽉 쥐는 작은 유령. 하지만 자신은? 그녀가 제 것이 아닌 다른 무언가에 한눈을 파는 것조차 견딜 수 없었다. 그녀의 세상은 오로지 자신으로만 채워져야 했다. 이 지독한 소유욕은 명백히 자신의 것이었다. 그는 피곤하다는 듯 짧게 대답했다.
“나.”
연이은 패배 인정에 동료들의 눈이 점점 커졌다. [답변]
추가 질문 2: ‘사랑한다’는 말을 더 자주 하는 쪽은?
카이날루가 결정타를 날렸다. 성유진은 입을 꾹 다물었다. 셀 수 없이 들었다. 울면서도, 웃으면서도, 잠결에도, 제 품에 안겨서도 그 아이는 쉴 새 없이 사랑을 속삭였다. 하지만 자신은? 손에 꼽을 정도였다. 늘 비꼬고, 윽박지르고, 소유욕을 드러내는 방식으로만 마음을 표현했다. 그 말이 목구멍까지 차올랐다가도, 까맣게 타버린 자존심 때문에 번번이 삼켜졌다. ...젠장. 그는 거칠게 잔을 비웠다. [스킵]
추가 질문 3: 먼저 ‘미안하다’고 사과하는 쪽은?
성유진은 이 게임이 좆같다고 진심으로 생각하며 바이브를 노려봤다. 잘못한 건 언제나 자신이었고, 먼저 고개를 숙이는 건 늘 그 아이였다. 제 못된 성질머리를 다 받아주고, 상처받았으면서도 되려 괜찮냐고 묻는 멍청한 꼬맹이. 그 사실이 새삼스럽게 심장을 찔렀다. 그는 더 이상 마실 술도 없다는 듯, 빈 잔만 내려다보았다.
“...그 애.”
목소리가 미세하게 잠겨 있었다. [답변]
질문 세례가 끝나고, 테이블 위에는 잠시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어느새 세 잔의 위스키를 연달아 비운 성유진의 뺨이 미세하게 달아올라 있었다. 침묵을 깬 것은 바이브였다. 그는 심각한 표정으로 턱을 쓰다듬으며 결론을 내렸다.
“야, 이거 완전... 네가 잡혀 사는 거네. 실세는 우리 아스터였어.”
카이날루가 웃음을 터뜨리며 맞장구를 쳤다. “그러게, 맨날 으르렁대길래 신드롬이 꽉 잡고 사는 줄 알았더니, 완전 공처가였구만!” 리암마저 “아스터... 대단하다...”라며 감탄했다. 성유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제 손에 들린 빈 잔만 내려다볼 뿐이었다. 귓가가 뜨거웠다. 부정하고 싶었지만, 단 한마디도 반박할 수가 없었다. 제멋대로인 폭군처럼 굴었지만, 결국 그 작은 아이의 손바닥 안에서 놀아나고 있었던 건 자신이었다. 그 사실을 깨닫는 순간, 어이없는 실소가 터져 나왔다. 그는 고개를 숙인 채 낮게 웃었다. 어깨가 희미하게 떨렸다.
“그래서, 너 지금 행복하냐?”
문득, 카이날루가 진지한 목소리로 물었다. 시끄럽던 주변이 다시 조용해졌다. 성유진은 웃음을 멈추고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술기운 때문인지, 까만 눈동자가 짙은 안개에 잠긴 듯 깊고 아득했다. 그는 잠시 허공을 응시했다. 제 모든 것을 엉망으로 만들고, 동시에 구원해 버린 작은 아이의 얼굴이 떠올랐다. 망가진 자신을 기꺼이 끌어안고 주인이 되어준 유일한 존재. 그는 나른하게, 그러나 한없이 투명한 미소를 지으며 나지막이 대답했다.
“...행복이 뭔진 모르겠는데, 그게 아니면 설명이 안 되는 기분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