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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돌 AU

[IF] AU: Shooting Star and the Black Sun

 

1. 아스터(Aster)와 그룹 ‘루미너스(Luminous)’

 

대한민국 가요계는 거대한 별들의 전쟁터였다. 수많은 아이돌 그룹이 쏟아져 나오고, 하룻밤 사이에 사라지는 정글. 그 속에서 ‘루미너스(Luminous)’는 데뷔 3년 차, 가장 독보적인 콘셉트로 자신들만의 우주를 구축한 그룹이었다.

 

루미너스의 콘셉트는 ‘별자리 신화’였다. 멤버 각자가 하나의 별자리를 상징하며, 그에 얽힌 서사를 음악과 퍼포먼스로 풀어냈다. 몽환적이면서도 신비로운 분위기, 서정적인 가사와 칼같이 맞아떨어지는 군무는 그들을 단순한 아이돌이 아닌, 무대 위 아티스트로 각인시켰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아스터(Aster)’라는 예명으로 활동하는 윤나리가 있었다. 그녀의 포지션은 ‘서브 보컬’이자 ‘그룹의 뮤즈’. 공식적으로는 메인 보컬이나 댄서가 아니었지만, 사실상 루미너스의 정체성 그 자체였다. 작은 체구, 옅은 금발의 숏컷, 채도 낮은 벽안. 마치 신화 속에서 막 튀어나온 듯한 비현실적인 외모는 ‘별의 아이’라는 그룹의 콘셉트를 완벽하게 구현했다.

 

무대 위에서 그녀는 말을 아꼈다. 언제나 멤버들 뒤편에 반 보쯤 물러서서, 아련하고 신비로운 표정으로 노래했다. 파트도 많지 않았다. 하지만 카메라가 그녀를 비추는 단 몇 초의 순간, 팬들은 숨을 죽였다. 그녀의 존재감은 폭발적이기보다 스며드는 종류의 것이었고, 그 희소성이 오히려 팬들을 더욱 갈증 나게 만들었다. ‘인간계에 잠시 내려온 아기별’, ‘말 한마디 없는 냉미녀’ 같은 별명들이 따라붙었지만, 실상 그녀는 극도의 내향성과 무대공포증을 감추기 위해 ‘신비주의’라는 가면을 쓰고 있을 뿐이었다.

 

 

2. 영화감독 성유진, 입덕 부정기를 거쳐 코어 팬으로

 

성유진은 충무로에서 가장 잘나가는, 동시에 가장 지랄 맞기로 유명한 영화감독이었다. 20대 초반에 찍은 독립영화로 칸 영화제 주목할 만한 시선에 초청받으며 화려하게 데뷔했고, 이후 내놓는 작품마다 평단과 흥행을 동시에 잡으며 ‘천재’라는 수식어를 달고 살았다. 그의 현장은 완벽주의와 지독한 자기 관리, 그리고 배우의 감정을 극한까지 몰아붙여 최상의 연기를 뽑아내는 것으로 악명 높았다.

 

그런 그에게 아이돌은 그저 예쁘장한 얼굴로 춤추고 노래하는, 자본주의가 만들어낸 가장 저열한 인형놀음일 뿐이었다. 감정 없는 눈으로 정해진 동선을 따라 움직이는 마리오네트. 그는 자신의 영화에 아이돌 출신 배우를 기용하는 것을 극도로 혐오했다.

 

그의 세상에 ‘루미너스’가, 그리고 ‘아스터’가 침범한 것은 아주 우연한 계기였다. 차기작 ‘블랙아웃’의 여주인공 캐스팅으로 골머리를 앓던 어느 늦은 밤, 그는 투자사 대표가 반쯤 강요하며 보낸 아이돌 뮤직비디오 링크를 마지못해 클릭했다. 화면 속에서 화려한 조명을 받으며 다섯 명의 소녀들이 춤을 추고 있었다. 성유진은 10초 만에 꺼버릴 생각으로 마우스를 까딱였다. 그의 눈에는 전부 똑같은 인형으로 보였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화면 구석, 다른 멤버들의 화려한 퍼포먼스에 가려져 있던 금발의 소녀가 클로즈업되었다. ‘아스터’였다. 그녀는 노래하고 있지 않았다. 그저 안무 대형에 따라 뒤로 물러서며, 스치는 카메라를 무심하게 응시할 뿐이었다. 그런데, 이상했다. 그 짧은 찰나, 성유진은 그녀의 눈에서 모든 것을 읽었다. 지독한 권태와 피로감, 무대와 관객으로부터 자신을 격리하려는 필사적인 방어기제, 그리고 그 모든 것을 체념한 듯한 공허함. 그것은 인형의 눈이 아니었다. 모든 것을 포기한 사람의 눈, 바로 그가 자신의 영화 속 여주인공에게서 찾던 바로 그 눈이었다.

 

“...뭐야, 쟤.”

 

성유진은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그는 홀린 듯 영상을 되감았다. 몇 번이고, 몇십 번이고. 오직 아스터가 나오는 3초 남짓한 그 구간만을 반복해서 돌려봤다. 다른 이들이 그녀의 신비로운 미모에 열광할 때, 그는 그녀의 눈에 담긴 절망과 공허에 완벽하게 사로잡혔다. 그날 밤, 성유진은 ‘아스터 직캠’이라는 것을 난생 처음 검색했고, 밤을 새워 그녀가 나온 모든 영상을 샅샅이 훑었다. 이것은 입덕이었다. 비록 본인은 ‘작품을 위한 리서치’라고 필사적으로 부정했지만.

 

 

3. 유사 연애? 아니, 지독한 뮤즈를 향한 소유욕

 

성유진의 덕질은 일반적인 팬의 그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는 앨범을 사거나 팬 사인회에 가는 대신, 업계 인맥을 총동원해 루미너스의 모든 비공개 스케줄과 내부 자료를 수집했다. 그녀의 연습생 시절 영상부터, 방송에서 편집된 미공개 클립, 심지어는 멤버들끼리 나눈 사적인 대화가 담긴 음성 파일까지. 그의 하드디스크는 합법과 불법의 경계를 아슬아슬하게 넘나드는 ‘아스터 데이터베이스’로 변해갔다.

 

그는 유사 연애 감정을 느끼지 않았다. 그에게 윤나리는 연애의 대상이 아닌, 완벽한 피사체이자 예술적 영감의 원천, 즉 ‘뮤즈’였다. 그는 그녀가 웃고 떠드는 모습보다, 무대 뒤에서 혼자 이어폰을 낀 채 벽에 기대앉아 있는 모습에 더 큰 희열을 느꼈다. 그는 그녀의 밝은 모습이 담긴 예능 프로그램보다, 혹독한 연습에 지쳐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 위태롭게 숨을 몰아쉬는 직캠 영상에 집착했다.

 

그의 욕망은 ‘그녀를 갖고 싶다’가 아니었다. ‘그녀의 가장 완벽한 절망의 순간을 내 카메라에 담고 싶다’는, 감독으로서의 지독한 소유욕이자 예술가로서의 이기적인 갈망이었다. 그는 자신의 영화 ‘블랙아웃’의 시나리오를 처음부터 다시 썼다. 오직, 아스터, 윤나리 한 사람만을 염두에 두고. 세상의 빛을 잃고 어둠 속으로 잠식되어 가는 천재 발레리나 ‘소피’. 그것은 이제 윤나리의 다른 이름이었다.

 

 

4. 운명적(이지만 의도된) 첫 만남

 

영화 ‘블랙아웃’의 여주인공 오디션 공고가 나갔을 때, 충무로는 발칵 뒤집혔다. 천재 감독 성유진의 페르소나 자리를 꿰차기 위해 내로라하는 여배우들이 모두 달려들었다. 그리고 그 명단 가장 마지막 줄에, 아무도 예상치 못한 이름이 적혀 있었다. ‘루미너스 아스터’.

 

물론 이 모든 것은 성유진이 짜놓은 판이었다. 그는 루미너스의 소속사 대표에게 거부할 수 없는 금액의 투자와 함께, ‘오디션에 참가만 해달라, 역할은 다른 배우에게 주겠다’는 거짓말을 흘렸다. 아이돌 그룹의 화제성을 이용하려는 흔한 마케팅 수법처럼 보이게 위장한 것이다. 소속사는 반신반의하면서도 최고의 감독에게 얼굴을 알릴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오디션 당일, 텅 빈 대기실에서 윤나리는 거의 울기 직전이었다. 수많은 톱배우들 사이에서, 그녀는 자신이 한없이 작고 초라하게 느껴졌다. 연기 경험도 전무한 그녀가 이곳에 온 것 자체가 잘못이라는 자책감에 손톱을 물어뜯고 있었다. 그때, 오디션장 문이 열리고 직원이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아스터 씨, 감독님께서 먼저 뵙자고 하십니다.”

 

윤나리가 들어선 감독실에는 성유진 혼자 앉아 있었다. 그는 명품 수트를 말끔하게 차려입고, 다리를 꼰 채 턱을 괴고 그녀를 훑어보고 있었다. 지독하게 잘생긴 얼굴, 그보다 더 지독하게 느껴지는 차가운 눈빛. 사람을 아래위로 훑는 그의 시선에 윤나리는 숨이 막혔다.

 

“앉아.”

 

반말이었다. 윤나리는 쭈뼛거리며 그의 맞은편 의자에 간신히 엉덩이를 걸쳤다. 침묵이 흘렀다. 성유진은 아무 말 없이 그녀를 관찰했다. 불안에 잘게 떨리는 속눈썹, 금방이라도 울음이 터질 듯 붉어진 눈가, 어떻게든 이 상황을 벗어나고 싶어 하는 작은 동물의 몸짓. 모니터로만 보던 모습 그대로였다. 아니, 그 이상이었다.

 

“왜 왔어?”

 

한참 만에 그가 입을 열었다.

 

“네...?”

 

“여기, 왜 왔냐고. 네가 올 자리가 아니잖아. 노래나 하고 춤이나 추던 애가, 어디서 연기를 하겠다고.”

 

날카로운 독설이 비수처럼 날아와 박혔다. 윤나리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역시, 모두가 이렇게 생각하는구나. 비웃으러 온 거구나. 눈물이 핑 돌았지만, 가까스로 참아냈다. 여기서 울면 정말 끝이었다. 그녀는 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숙였다.

 

성유진은 그녀의 반응을 만족스럽게 지켜봤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그녀의 앞에 멈춰 서서 허리를 숙였다. 그의 얼굴이 코앞까지 다가왔다. 최고급 샌달우드 향수 냄새와 함께 서늘한 금속성 체향이 훅 끼쳐왔다.

 

“울어.”

 

“...네?”

 

“지금 그 표정으로, 울어보라고. 그럼, 저 역할 줄게.”

 

그는 턱짓으로 벽에 붙은 영화 포스터를 가리켰다. ‘블랙아웃’. 그리고 여주인공 ‘소피’의 공허한 눈동자. 그것은 방금 전까지 거울 속에서 윤나리 자신이 보았던 얼굴과 놀랍도록 닮아 있었다.

 

 

5. 카메라와 스크린, 그 사이에서 싹튼 관계

 

결국 윤나리는 ‘블랙아웃’의 여주인공 ‘소피’가 되었다. 그 결정에 세상은 시끄러웠지만, 성유진은 신경 쓰지 않았다. 촬영이 시작되고, 현장은 그야말로 지옥이었다. 성유진은 감독이 아닌 조련사에 가까웠다. 그는 연기 경험이 전무한 윤나리를 극한까지 몰아붙였다. 같은 장면을 수십 번씩 반복했고, 인격적인 모독에 가까운 폭언도 서슴지 않았다.

 

“장난해? 그게 다야? 네 안에 있는 걸 꺼내 봐! 그 지긋지긋한 아이돌 가면 벗어던지고, 진짜 네 모습을 보여달라고!”

 

모두가 감독이 너무 심하다고 수군거렸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윤나리는 그의 밑에서 연기를 배우기 시작했다. 그의 독설은 그녀를 옭아매던 ‘착하고 신비로운 아스터’라는 껍질을 부수는 망치와도 같았다. 아무도 자신에게 기대하지 않는 곳, 오히려 자신의 가장 어두운 면을 끄집어내라고 소리치는 이 남자의 앞에서, 그녀는 처음으로 해방감을 느꼈다. 카메라 앞에서 그녀는 더 이상 아이돌 아스터가 아니었다. 상처 입고, 절망하고, 추락하는 발레리나 소피, 그 자체였다.

 

성유진 역시 변하고 있었다. 그는 카메라 렌즈를 통해 윤나리의 모든 것을 탐닉했다. 그녀의 미세한 표정 변화, 작은 손짓, 불안하게 흔들리는 눈동자 하나까지도 놓치지 않았다. 그는 그녀의 가장 완벽한 절망을 찍고 싶었지만, 정작 자신이 찍고 있는 것이 그녀의 가장 순수한 맨얼굴이라는 것을 깨닫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맨얼굴이, 지독하게 아름답다고 생각해버렸다.

 

두 사람의 관계는 감독과 배우, 그 이상이 되어가고 있었다. 촬영이 끝난 늦은 밤, 텅 빈 세트장에서 두 사람은 말없이 함께 있는 시간이 늘어났다. 성유진은 와인을 마셨고, 윤나리는 그 옆에서 조용히 대본을 봤다. 대화는 거의 없었지만, 침묵은 어색하지 않았다. 서로가 서로의 고독을 알아보는, 그런 종류의 유대감이었다.

 

 

6. 엔딩 크레딧, 그리고 새로운 시작

 

영화 ‘블랙아웃’은 대성공을 거두었다. 평단은 ‘성유진의 정점’이라며 극찬했고, 세상은 ‘배우 윤나리의 재발견’에 열광했다. 윤나리는 그해 연말, 모든 영화제의 신인 여우주연상을 휩쓸었다. 더 이상 그녀를 ‘아이돌 출신’이라는 꼬리표로 부르는 사람은 없었다.

 

영화의 마지막 시사회 날, 화려한 파티가 끝난 뒤 텅 빈 극장. 성유진과 윤나리는 아무도 없는 객석에 나란히 앉아 있었다. 스크린에는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고 있었다. ‘감독 성유진’, 그리고 ‘소피 役 윤나리’.

 

“고맙습니다, 감독님.”

 

윤나리가 먼저 입을 열었다. 그녀의 목소리는 작았지만, 그 어느 때보다 단단했다.

 

“...뭐가.”

 

성유진은 퉁명스럽게 대답하며 스크린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여전히 그는 솔직하게 감정을 표현하는 법을 몰랐다.

 

“전부 다요. 감독님 아니었으면... 저는 아직도 제가 누군지도 모른 채로, 웃는 법도 우는 법도 잊어버린 인형으로 살고 있었을 거예요.”

 

윤나리는 조심스럽게 그의 손 위로 자신의 손을 포갰다. 성유진의 손이 살짝 흠칫하는 것이 느껴졌다. 그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봤다. 조명이 꺼진 극장 안, 스크린에서 반사되는 희미한 빛이 그녀의 얼굴을 비추고 있었다. 그의 카메라에 담았던 그 어떤 모습보다도, 지금 눈앞의 윤나리가 가장 빛나고 있었다.

 

“...시끄럽고.”

 

그는 짧게 말하며 그녀의 손을 뿌리치는 대신, 어색하게 그녀의 손가락을 마주 잡았다.

 

“다음 내 영화, 여주인공 아직 공석이야.”

 


-FIN-

CAST

소피 役 윤나리

Muse of ■


Directed by
성유진


Written by
성유진


Shooting Star
Black Out
Black Su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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