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 나의 작은 배터리, 윤나리
이딴 걸 쓰게 될 줄은 몰랐다.
센터 놈들이 재해급 빌런이 떴다며 호들갑을 떨더니, 같잖은 종이 쪼가리를 내밀더군. 유서 작성 권고. 엿이나 처먹으라고 면전에 던져주려다, 그냥 들고 왔다. 어차피 버릴 쓰레기라고 생각했는데, 빌어먹게도 네 얼굴이 떠올라서. 그래서 지금, 나는 이걸 쓰고 있다. 아마 네가 이걸 읽게 될 때쯤이면, 나는 이미 재가 되어 바람에 흩날리고 있거나, 어느 괴물의 뱃속에서 소화되고 있겠지. 상상만 해도 좆같군. 내 마지막이 그렇게 추한 꼴이라니. 하지만 뭐, 어쩌겠나. 그게 센티넬의 숙명이라는 걸, 너나 나나 이미 알고 있었으니까.
웃기지 않냐, 윤나리. 내가 누군가에게 이런 편지를 쓰고 있다는 게. 천하의 성유진이, 신드롬이. 평생을 남들 시선 속에서 연기하며 살아왔고, 그 지긋지긋한 감정 노동에서 해방된 순간부터는 오직 나 자신만을 위해 모든 것을 불태우겠다고 다짐했는데. 그런데 지금 나는, 혹시나 내가 돌아오지 못할까 봐, 너에게 마지막 말이라도 남겨야겠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다. 좆같은 소리지만, 이게 지금 내 진심이다.
너를 처음 만났던 날을 기억한다. S급 미션 현장. 모든 것을 집어삼킬 듯이 불타오르는 화염 속에서, 나는 폭주 직전의 경계에 서 있었다. 머릿속은 타들어 가는 것 같았고, 온몸의 신경은 비명을 질렀다. 그 순간 내게 필요했던 건 오직 파괴와 해방감뿐이었다. 그런데 그때 네가 나타났지. 시커먼 재를 뒤집어쓴 채, 엉망인 얼굴로. 젠장, 얼마나 늦게 기어들어온 거냐고 소리쳤던가. 그때의 나는 널 한심하고 쓸모없는, 그저 그런 임시 가이드로 취급했다. 아니, 사실은 그 이상이었다. 넌 내게 있어 통제의 상징이었고, 혐오의 대상이었다. 내 폭주를 억누르는 족쇄. 내 자유를 억압하는 굴레. 그래서 더 거칠게 널 다뤘다. 일부러 상처 주는 말을 골라 던지고, 네가 겁먹는 표정을 보며 비열한 만족감을 느꼈다.
그랬던 내가, 어느 순간부터 너를 기다리고 있더군. 임무가 끝나면 당연하다는 듯이 너를 찾았고, 네가 없는 현장은 어딘가 허전했다. 까칠하게 쏘아붙이고, 건방지게 도발하고, 일부러 심술궂게 굴면서도, 네가 내 시야 안에 있기를 바랐다. 네가 기죽지 않고 꼬박꼬박 말대꾸하는 모습이 짜증 나면서도 재미있었고, 내 지독한 말에도 결국 내 곁에 남는 그 고집이 신기했다. 너는 내가 만들어놓은 벽을, 아주 작고 멍청한 망치로, 포기하지 않고 계속해서 두드렸다. 나는 그 소리가 거슬려서 미칠 것 같았는데, 정신을 차리고 보니 그 망치 소리가 들리지 않으면 불안해하는 나를 발견했다. 빌어먹을. 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나의 작은 배터리. 내가 너를 그렇게 부르기 시작했을 때부터였을지도 모른다. 너는 내게 그저 에너지를 공급하는 존재,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고 선을 그었다. 하지만 그건 나의 가장 큰 거짓말이었다. 너는 단순한 배터리가 아니었다. 너는 내게 방전될 걱정 없이 마음껏 불타오를 수 있는 세상을 선물했고, 동시에 그 모든 화염이 꺼진 뒤에도 돌아갈 곳이 있다는 안도감을 주었다. 나는 평생을 '신드롬'으로, '유진'으로 살아왔지만, 네 앞에서는 그 모든 가면을 벗어던지고 그냥 '성유진'이 될 수 있었다. 아무것도 연기하지 않아도 되는, 엉망진창이고 이기적인 나를, 너는 아무 말 없이 그냥 받아들여 줬다.
네가 내 셔츠를 입고 주방에 나타났을 때, 나는 정말 미치는 줄 알았다. 그 작은 몸으로 내 옷을 걸치고, 어색하게 서 있던 그 모습이... 그 순간, 나는 너를 단순히 내 가이드나 파트너가 아니라, 내 여자로, 내 소유물로, 내 세상의 전부로 만들고 싶다는 강렬한 욕망에 사로잡혔다. 네가 내 품에서 잠들 때, 네 숨소리를 들으며, 나는 처음으로 '집'이라는 걸 가졌다. 엉망진창인 내 숙소가, 너 하나로 완벽한 안식처가 되었다. 꼬르륵거리던 네 배 소리에, 나를 불태우던 모든 욕망이 한순간에 사그라들었던 그 순간을, 나는 아마 죽어서도 잊지 못할 거다. 그때 알았다. 나는 너에게 완전히 졌다는 걸. 너라는 존재 앞에서, 나의 모든 오만함과 자존심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걸.
만약 내가 돌아오지 못한다면... 그래, 만약이라는 말은 질색이지만, 지금은 써야겠지. 만약 내가 돌아오지 못한다면, 너무 오래 슬퍼하지는 마라. 물론 네가 나를 위해 울어줬으면 좋겠다는 이기적인 생각도 들지만, 네가 눈물로 시간을 허비하는 건 내가 더 참을 수 없을 것 같다. 너는 울 때 못생겼으니까. ...아니, 사실은 그것도 예쁘지만, 그래도 웃는 게 백배는 더 낫다. 그러니까 그냥, 가끔 내가 만들어줬던 파스타 맛이나 떠올리면서, '그 재수 없는 놈, 요리는 제법이었지' 하고 피식 웃어주면 그걸로 됐다.
내 모든 재산은 네 것이다. 변호사를 통해 모든 절차를 끝내 뒀다. 귀찮게 굴던 네 쌍둥이 오빠나 그 같잖은 집안 놈들이 네게 손댈 수 없도록, 모든 법적 장치도 마련해 놨다. 네가 그 그림자에서 벗어나 온전히 너 자신으로 살아가길 바랐다. 내가 없더라도. 이제 너는 누구의 배경도, 누구를 돋보이게 하는 조연도 아니다. 너는 윤나리, 그 자체로 완벽한 주인공이다. 그러니 마음껏 써라. 평생 놀고먹어도 다 못 쓸 만큼 쌓아뒀으니까. 집을 사든, 세계 여행을 하든, 아니면 그냥 매일 배달 음식을 시켜 먹든, 네가 하고 싶은 거 다 해. 그게 내가 너에게 주는 마지막 선물이자 명령이다.
그리고 그 다이아몬드 목걸이. 버리든, 팔든, 네 마음대로 해라. 그건 너를 묶어두려던 내 소유욕의 증표였지만, 이제 와 생각해 보니 너는 그런 걸로 묶어둘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다. 너는 나를 네 곁에 묶어둔, 작고도 강력한 주인이었으니까.
혹시 다른 센티넬을 만나게 되더라도, 나만큼 까다롭고 성격 더러운 놈은 만나지 마라. 너는 충분히 고생했다. 너를 아껴주고, 다정하게 대해주고, 네가 삐질 때마다 먼저 사과할 줄 아는 그런 놈을 만나. 뭐, 물론 나보다 잘생기고, 나보다 요리를 잘하고, 나보다 돈이 많은 놈은 이 세상에 없을 테니 그건 걱정하지 않아도 되겠지만. 만약 그런 놈이 나타난다면, 내가 지옥에서라도 기어 나와서 그놈의 면상을 불태워 버릴 테니까.
이 편지를 쓰는 지금, 창밖이 밝아오고 있다. 곧 소집 명령이 떨어지겠지. 마지막으로 네 얼굴을 보고 가고 싶은데, 자고 있는 널 깨우고 싶지는 않다. 평화롭게 잠든 네 얼굴을 망치고 싶지 않다. 그냥, 내가 없는 침대가 조금 넓고 허전하게 느껴지더라도, 금방 익숙해져라. 그게 네가 나를 위해 해줄 수 있는 마지막 배려다.
사랑한다는 말은 하지 않겠다. 그런 낯간지러운 말은 내 취향이 아니니까. 대신, 이걸 기억해. 너는 내게 유일한 구원이었고, 나의 가장 완벽한 해방이었으며, 내 지독한 삶의 유일한 의미였다. 너를 만나기 전의 성유진은 텅 빈 껍데기였고, 너를 만난 후의 신드롬은 비로소 완전해졌다. 그걸로 충분하다.
그러니, 나의 작은 배터리. 나의 작은 주인님.
부디, 잘 살아라.
내가 없더라도, 반드시.
From. 너의 대마왕, 신드롬
유서 작성 완료. (기분 더러움)
- 재산 상속 및 법적 보호 장치 확인 끝.
- 다이아몬드 목걸이는 결국 네 차지다.
- 살아 돌아오면 이 편지는 반드시 불태운다.
거짓말...
우리 아직도 종속과 지배와 사육이 붙어있는데...?
ㄴ익명의 지인: 종속과 지배와 사육과 순애는 같은 결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