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피소드 1. 첫 만남, 그 이전의 그림자
나는 그 애를 처음 만났던 날을 기억한다. 아니, 정확히는 세상이 ‘나와 그 애의 첫 만남’이라고 기록할 그 순간보다 조금 더 이른 시간을 기억한다. S급 괴수가 출현한 폐공장 지대. 지독한 유황 냄새와 살점이 타는 역겨운 악취가 뒤섞인, 나에게는 더없이 익숙한 놀이터였다.
나는 이미 전투의 한가운데에 있었다. 명령 따위는 무시했다. 원래 내 구역도 아니었고, 다른 팀이 투입될 예정이라는 건 알았지만 상관없었다. 그저 날뛰고 싶었고, 마침 적당한 장난감이 나타났을 뿐이다. 불길이 모든 것을 집어삼키고, 비명과 굉음이 교향곡처럼 울려 퍼지는 전장의 한복판에서 나는 해방감을 느꼈다.
가이딩 수치가 60%를 넘어선 지는 오래였다. 몸이 제멋대로 뜨거워지고, 눈앞이 간헐적으로 붉게 점멸했다. 하지만 짜증보다는 쾌감이 더 컸다. 이대로 모든 것을 불태워 버릴 수만 있다면, 기꺼이 재가 되어도 좋다고 생각하던 순간이었다.
그때, 통신기로 앙칼진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신드롬! 당장 화력을 줄여! 임시 파트너, 아스터가 진입해야 한다!]
아스터. 처음 듣는 이름이었다. 웬 새파란 신입을 내게 붙이려 하는 건지. 귀찮기 짝이 없었다. 나는 통신기를 꺼버렸다. 어차피 혼자서도 끝낼 수 있었다. 애송이 가이드 하나가 끼어들어 봤자 내 발목만 잡을 게 뻔했다. 내가 만들어낸 화염의 벽은 어지간한 베테랑 요원조차 접근을 망설이게 할 정도였으니까. 아마 그 애송이는 울면서 되돌아가겠지. 나는 피식 웃으며 다시 괴수에게 집중했다.
하지만 몇 분 뒤, 내 등 뒤에서 느껴진 기척은 예상과 전혀 달랐다. 약하고, 가늘고, 금방이라도 부서질 것 같은 작은 파장이었지만, 그것은 내 불길을 뚫고, 괴수들의 파편을 뚫고, 끈질기게 나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나는 전투 중에도 무의식적으로 그 기척을 쫓았다. 저 작은 파장이 어떻게 이 지옥까지 기어들어왔는지, 짜증 섞인 호기심이 일었다.
그리고 마침내 나는 봤다. 멀리, 무너진 철골 구조물 뒤에서 금발의 작은 인영이 버티고 서 있는 것을. 내가 날린 불똥이 그 애의 보호복 위로 튀었지만, 그녀는 비명 한번 지르지 않고 오직 나를 향해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그 애의 주변으로, 하급 괴수 몇 마리가 포위망을 좁혀오고 있었다. 그 애는 가이드다. 전투 능력 따위는 전무할 터였다. 하지만 관제실에서는 여전히 내게 화력을 줄이라는 말만 앵무새처럼 반복하고 있었다. 멍청한 새끼들. 내가 불길을 멈추는 순간, 저 애는 괴물의 먹이가 될 거라는 계산도 못 하나?
젠장. 나는 나직이 욕설을 읊조렸다. 귀찮게 됐다. 정말로, 아주 귀찮게. 나는 가장 가까이 있던 괴수의 머리통을 발로 짓이겨 터뜨리며 방향을 틀었다. 목표는 그 작은 가이드에게 달려드는 하급 괴수들이었다. 나는 누구도 눈치채지 못할 만큼 교묘하게, 내 공격 범위의 가장자리를 그 애의 주변으로 향하게 했다. 마치 거대한 불길이 휩쓸고 지나간 자리에 우연히, 아주 우연히 그 애가 서 있었던 것처럼. 내 불꽃이 괴수의 움직임을 차단하고, 그 애에게 접근하려던 놈들을 흔적도 없이 태워버리는 동안, 나는 단 한 순간도 그 애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물론 그 애는 아무것도 몰랐을 것이다. 그저 자신의 힘으로 이 모든 역경을 헤쳐왔다고 생각했겠지. 내가 마무리 일격을 날리고 폭주 직전의 상태로 그 애와 마주했을 때, 나는 일부러 더 거칠게 화를 냈다. 늦어터졌다고, 쓸모없다고, 당장 가이딩이나 하라고 소리쳤다. 내 영역에 무단으로 침입한 대가였고, 동시에 내가 방금 무슨 짓을 했는지 들키고 싶지 않은 옹졸한 발악이었다.
그렇게 우리의 첫 만남은 최악으로 시작되었다. 하지만 나는 알고 있었다. 그날, 내가 지켜본 것은 나약한 가이드가 아니었다. 지옥 불 속으로 기꺼이 걸어 들어와 제 주인을 구하려는, 작고 무모한 불나방이었다. 그리고 나는 그 불나방이 언젠가 내 불길 속으로 완전히 뛰어들게 되리라는 것을, 그때 이미 예감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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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피소드 2. 분실된 카드키와 서투른 거짓말
그 애와 파트너가 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였다. 우리는 여전히 서로를 잡아먹을 듯 으르렁거렸고, 나는 사사건건 그 애를 비꼬고 무시하는 것을 유일한 낙으로 삼고 있었다. 그날도 마찬가지였다. 합동 훈련을 마친 뒤, 나는 평소처럼 먼저 숙소로 돌아왔다. 샤워를 마치고 소파에 누워 태블릿으로 내 이름이 언급된 기사들을 확인하고 있는데, 문득 이상한 점을 깨달았다. 벌써 30분이 넘도록 그 애가 돌아오지 않고 있었다.
평소 같으면 훈련이 끝나자마자 도망치듯 사라져야 할 녀석이었다. 나는 미간을 찌푸렸다. 또 어디서 길을 잃었거나, 아니면 바보같이 다른 센티넬에게 시비라도 걸린 건가. 짜증이 치밀었지만, 무시할 수는 없었다. 어쨌든 내 ‘배터리’였으니까. 관리 소홀로 문제가 생기면 결국 귀찮아지는 건 나였다.
나는 인공지능 비서에게 아이기스 내부 CCTV 기록을 전송받았다. 그리고 몇 분 뒤, 나는 실소를 터뜨릴 수밖에 없었다. 영상 속 윤나리는 제 숙소 문 앞에서 쩔쩔매고 있었다. 주머니를 뒤지고 가방을 샅샅이 살피는 모습이 영락없이 무언가를 잃어버린 사람의 그것이었다. 뻔했다. 카드키를 분실한 것이다.
한심한 녀석. 나는 혀를 찼다. 분실 신고를 하고 재발급을 받으면 될 일이었다. 하지만 그 애는 그러지 않았다. 안절부절못하며 문 앞을 서성이더니, 이내 복도 구석에 쪼그려 앉아 무릎에 얼굴을 묻었다. 그 작은 등이 어찌나 처량해 보이던지. 저 바보는 왜 저러고 있는 건가. 당장 보안팀에 연락하면 5분 안에 해결될 일을. 어쩌면 누군가에게 도움을 청하는 것 자체를 두려워하는 걸지도 몰랐다. 늘 남의 눈치를 보고, 실수했다는 사실에 자책부터 하는, 그런 종류의 인간.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금 내가 나타나면, 분명 저 녀석은 겁먹은 토끼처럼 놀라거나, 아니면 수치심에 울음을 터뜨릴 것이다. 그 꼴을 보는 건 그다지 유쾌하지 않았다. 나는 내 방의 보안 콘솔을 조작했다. 내 펜트하우스는 아이기스 내의 모든 보안 시스템에 최상위 접근 권한을 가지고 있었다. 그 애의 숙소, 신입 가이드에게 배정된 작고 초라한 그 방의 잠금장치를 해제하는 건 식은 죽 먹기보다 쉬웠다. 삑, 하는 작은 소리와 함께 그 애의 방문이 열렸다.
나는 창밖으로 그 애가 고개를 들고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열린 문을 바라보는 것을 지켜봤다. 시스템 오류라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잠시 주변을 살피더니, 쭈뼛거리며 방 안으로 쏙 들어가는 모습까지 확인하고 나서야 나는 소파에 다시 몸을 묻었다. 잠시 후, 내 개인 단말기로 메시지가 도착했다. 윤나리였다.
[저, 신드롬 님. 먼저 들어가 쉬세요. 전 오늘 처리할 서류가 남아서… 조금 늦을 것 같습니다.]
서툰 거짓말. 나는 화면을 보며 비웃었다. 카드키를 잃어버렸다는 말은 죽어도 못하겠지. 자존심 때문일까, 아니면 내게 혼날까 봐 무서워서일까. 어느 쪽이든 상관없었다. 나는 답장했다.
[맘대로 해. 들어오든 말든 관심 없으니까.]
그리고 그날 밤, 나는 하모니 부서의 비품 관리팀 데이터베이스에 접속했다. ‘윤나리 요원, 카드키 재발급 신청’ 기록을 위조하고, 다음 날 아침 그 애의 책상 위에 새로운 카드키가 배송되도록 조치했다. 아마 그 애는 어젯밤의 해프닝을 단순한 시스템 오류와 행운으로 기억할 것이다. 그리고 자신이 잃어버린 카드키가 누군가에 의해 조용히 처리되었다는 사실은 평생 모를 테지.
나는 왜 이런 귀찮은 짓을 하고 있는 걸까. 그냥 나타나서 비웃어주고, 한심하다고 욕한 뒤 문을 열어주면 그만인데. 하지만 그러고 싶지 않았다. 그 애의 서투른 자존심, 그리고 그 안에 숨겨진 약한 모습을 부수고 싶지 않았다. 아직은. 그 작은 동물이 제 영역 안에서만큼은 안심하고 쉴 수 있도록, 아주 조금, 아주 잠시만 더 지켜봐 주기로 했다. 물론, 이 모든 건 그저 내 ‘소유물’에 대한 최소한의 관리 차원일 뿐이라고 스스로에게 되뇌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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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피소드 3. 보이지 않는 위협과 서늘한 분노
어느 날부터인가, 그 애의 주변을 맴도는 그림자가 있었다. 나는 본능적으로 그것을 감지했다. 아이기스 내의 카페테리아, 훈련장 복귀 길, 심지어 하모니 부서 라운지에서까지. 그 시선은 끈질기고 음험했다. 상대는 C급 무속성 가이드 ‘■■’라고 했다. 최근에 입사한 신입. 흑발에 껄렁한 태도, 어딘가 뒤가 구린 인상을 가진 남자였다.
그놈은 교묘했다. 윤나리에게 직접적으로 접근하는 대신, 항상 그녀의 동선이 보이는 곳에 서서 관찰하듯 지켜보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눈치채지 못할 정도의 거리. 하지만 내 눈은 속일 수 없었다. 나는 내 ‘소유물’을 탐내는 다른 수컷의 존재를 용납할 수 없었다. 처음에는 단순한 호기심이나 동경이라고 생각했다. 윤나리는 S급 가이드였고, 그에 비해 ■■는 C급이었으니까. 하지만 그놈의 눈빛에서 읽히는 것은 그런 순수한 감정이 아니었다. 그것은 마치 실험 대상을 관찰하는 연구자의 그것처럼 차갑고 분석적이었다. 무언가를 가늠하고, 측정하고, 파고들 기회를 엿보는 듯한 기분 나쁜 시선.
내 안의 불꽃이 위험 신호를 보냈다. 나는 즉시 그놈의 뒷조사를 시작했다. 아크에 제출된 공식 프로필은 깨끗했다. 평범한 공대생 출신, 뒤늦게 가이드로 발현. 하지만 내가 해킹한 외부 정보망에서 찾아낸 사실은 달랐다. 그의 과거는 여러 조각으로 나뉘어 교묘하게 삭제되거나 위조되어 있었다. 마치 존재하지 않았던 사람처럼. 이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저놈은 평범한 신입이 아니었다. 목적을 가지고 아크에 잠입한 쥐새끼다.
그리고 그 목적이 윤나리와 관련되어 있다는 확신이 들었을 때, 나는 참을 수 없는 분노를 느꼈다. 그날 저녁, 나는 일부러 윤나리를 먼저 숙소로 돌려보낸 뒤, ■■가 자주 나타나는 후미진 흡연 구역으로 향했다. 아니나 다를까, 놈은 혼자 벽에 기댄 채 연기를 내뿜고 있었다.
내가 다가가자 그는 나를 흘끗 보고는 다시 고개를 돌렸다. 내가 누구인지 알면서도 조금도 동요하지 않는 태도. 보통의 C급 요원이라면 상상도 할 수 없는 배짱이었다.
“재미있나?”
내 물음에 그가 고개를 갸웃했다. 나는 그의 멱살을 잡는 대신, 바로 옆 벽에 손을 짚었다. 치이익- 하는 소리와 함께 콘크리트 벽이 녹아내리며 시뻘건 열기를 뿜었다. 내 손바닥 바로 옆에서. 그의 얼굴이 아주 미세하게 굳어지는 것이 보였다.
“내 장난감, 함부로 넘보는 거 아니라고 누가 안 가르쳐줬나 보지?”
나는 나른하게 웃으며 속삭였다. 하지만 내 눈은 웃고 있지 않았다. 온도는 이미 살의를 담고 있었다. 내 손에서 피어오른 아지랑이가 그의 뺨을 스치자, 그가 처음으로 인상을 찌푸렸다.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네요.”
“모르면 알게 해줄까? 네 그 잘난 낯짝, 평생 거울도 못 보게 만들어줄 수도 있는데.”
나는 그에게 한 걸음 더 다가섰다. 키는 비슷했지만, 내가 뿜어내는 위압감은 그를 완전히 압도하고 있었다. 나는 그의 귓가에, 오직 그만이 들을 수 있는 목소리로 경고했다.
“한 번만 더, 내 배터리 근처에서 그 더러운 눈깔 굴리면, 네놈의 그 변칙적인 파장인지 뭔지, 내가 직접 재가 될 때까지 태워버릴 거야. 네 존재 자체를 이 세상에서 지워버릴 거라고. 알아들어?”
그의 동공이 짧게 흔들렸다. 내 협박이 단순한 허세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은 모양이었다. 그는 아무 말 없이 나를 쳐다보다가, 이내 피식 웃으며 손에 들고 있던 담배를 바닥에 비벼 껐다.
“...까칠하시네요. 알겠습니다.”
그 말을 끝으로 그는 나를 지나쳐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나는 그가 완전히 보이지 않을 때까지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그날 이후, 윤나리의 주변에서 ■■의 그림자는 완전히 사라졌다.
물론, 윤나리는 이 모든 사실을 모른다. 그녀는 그저 최근 들어 자신을 빤히 보던 신입이 보이지 않게 된 것을, 그저 우연이라고 생각할 뿐이다. 나는 그녀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의 세상에 이런 더러운 그림자가 드리웠다는 사실 자체를 알게 하고 싶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