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처럼 찾아온 평온한 휴일의 오후였다. 최근 연달아 터진 긴급 임무와 보고서 처리, 그리고 다음 작전 브리핑까지 정신없는 나날이 이어졌다. 전장을 불태우는 S급 센티넬이자 ARCH의 간판 스타인 신드롬에게는 단 하루의 휴식조차 사치에 가까웠다. 하지만 오늘은 달랐다. 아이기스 전체를 감싼 방음벽 너머로 폭풍우가 몰아치는지, 아니면 괴수 떼가 도시를 습격하는지 알 바 아니었다. 이 펜트하우스의 두꺼운 강철 벽과 최첨단 보안 시스템은 바깥세상의 모든 소음을 완벽하게 차단하고 있었다.
나른한 오후의 햇살이 통유리창을 통해 쏟아져 들어와 거실 바닥에 긴 사각형을 그렸다. 공기 중에는 값비싼 원두의 향과 어젯밤 피워둔 샌달우드 향초의 잔향이 옅게 섞여 감돌았다. 성유진은 푹신한 소파에 깊게 몸을 묻고 눈을 감고 있었다. 검은색 실크 셔츠는 단추 두어 개가 풀려 느슨했고, 편안한 트레이닝 팬츠 차림이었다. 며칠간 쌓인 피로가 한꺼번에 몰려오는 듯했지만, 성가신 종류의 피곤함은 아니었다. 오히려 모든 긴장이 녹아내리는 듯한, 기분 좋은 나른함이었다.
그 평화의 중심에는, 제 무릎 바로 옆 소파 바닥에 등을 기대앉은 작은 온기가 있었다. 윤나리. 그의 작은 주인, 그의 배터리. 그녀는 그의 다리에 뺨을 기댄 채, 조용히 그의 옷자락 끝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규칙적으로 오르내리는 어깨, 쌕쌕거리는 고른 숨소리. 그저 곁에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그의 예민한 신경을 잠재우는 유일한 존재. 그는 이 고요하고 완벽한 순간이 영원처럼 느껴졌다.
최근 며칠, 그녀와 제대로 된 시간조차 보내지 못했다. 임무에서 돌아오면 지친 몸으로 그녀를 품에 안고 가이딩을 받으며 잠드는 게 전부였다. 식사도 제대로 챙겨주지 못했고, 그녀가 좋아하는 달콤한 디저트를 사다 줄 여유도 없었다. 그럼에도 그녀는 단 한 번의 불평도, 투정도 없이 묵묵히 그의 곁을 지켰다. 마치 주인이 돌아오기만을 기다리는 작은 동물처럼. 그 사실이 한편으로는 미안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지독한 소유욕을 자극했다. 자신 외에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 이 순종적인 존재. 온전히 자신의 손아귀에 들어와 버린 가여운 공주님.
그는 눈을 감은 채, 자신의 무릎에 기댄 그녀의 머리칼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찰랑이는 금발이 손가락 사이를 기분 좋게 스쳤다. 모든 것이 완벽했다. 이대로 잠시 눈을 붙여도 좋을 것 같았다. 그때였다. 만지작거리던 손길이 멈추고, 제 옷자락을 쥔 작은 손에 희미하게 힘이 들어가는 것이 느껴졌다. 그리고 잠시 후, 조심스럽게 고개를 든 그녀의 시선이 제게 와 닿았다.
"…시, 신드롬 님..."
나직하게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 그는 감았던 눈을 천천히 떴다. 살짝 붉어진 뺨, 무언가 망설이는 듯한 벽안이 그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묘한 불안감과 애정이 뒤섞인 눈빛. 대체 무슨 말을 하려는 걸까. 그는 대답 대신, 그저 묵묵히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요즘은… 왜 조, 좋아한다고 잘 안 해주세요...? 귀엽다는 말도… 잘 안 해주고…."
속삭이듯 흘러나온 질문은 깃털처럼 가벼웠지만, 그의 심장에 묵직하게 내려앉았다. 그 순간, 그의 머릿속을 스치는 것은 복잡한 감정의 소용돌이였다. 첫째는 당혹감. 자신이 그런 말을 자주 했었나? 그는 애정 표현에 인색한 사람이었다. '좋아한다', '귀엽다' 같은 간지러운 말들은 그의 어휘 사전에 존재하지 않았다. 그가 그녀에게 하는 최고의 표현은 소유하고, 지배하고, 흔적을 남기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 작은 동물은 그런 원초적인 소유의 증명보다, 고작 말 몇 마디를 더 갈구하고 있었다. 어이가 없으면서도, 한편으로는 제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는 것을 느꼈다. 잊고 있었다. 그녀는 그와 다른 방식으로 사랑을 확인받고 싶어 한다는 것을. 자신은 그저 주는 것에만 익숙했을 뿐, 그녀가 무엇을 원하는지는 제대로 살피지 못했던 것이다.
두 번째 감정은 날카로운 죄책감이었다. 바쁘다는 핑계로, 피곤하다는 이유로 그는 그녀를 방치했다. 물리적으로는 같은 공간에 있었지만, 정서적으로는 그녀를 외롭게 만들었다. 항상 자신만만하고 오만불손한 그였지만, 이 작은 존재의 애정결핍이 담긴 눈빛 앞에서는 속수무책이었다. 그녀의 탓이 아니었다. 전부 자신의 불찰이었다. 배우 시절, 수많은 팬들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기계처럼 내뱉었지만 단 한 번도 진심을 담은 적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진심을 전해야 할 단 한 사람에게, 그는 오히려 가장 인색하게 굴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그의 내면 깊은 곳에서부터 걷잡을 수 없는 정복욕과 보호 본능이 동시에 들끓었다. 겨우 말 몇 마디에 이렇게 불안해하는 모습. 자신이 아니면 안 된다고, 온몸으로 애원하는 듯한 저 가련한 모습이 그의 가학심을 자극하면서도 동시에 미칠 듯이 사랑스러웠다. 이 작은 것을 누가 이렇게 만들었는가. 바로 성유진, 그 자신이었다. 그렇다면 책임져야 했다. 그녀가 다시는 이런 사소한 것으로 불안해하지 않도록, 사랑받고 있다는 사실을 뼛속까지 각인시켜 줄 필요가 있었다.
성유진은 천천히 상체를 일으켰다. 그의 움직임에 윤나리의 어깨가 살짝 흠칫, 떨렸다. 자신이 뭔가 잘못된 질문을 했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그는 피식 웃으며, 제 무릎 옆에 웅크린 그녀의 턱을 부드럽게 잡아 들어 올렸다. 강제로 시선이 마주치자, 불안하게 흔들리는 파란 눈동자가 고스란히 보였다. 그는 그 여린 눈동자를 지그시 마주 보며, 낮고 나른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랬나? 내가?"
시치미를 떼는 듯한 질문. 그는 일부러 대답할 틈을 주지 않고, 그녀의 턱을 쥔 손에 힘을 주어 얼굴을 더 가까이 끌어당겼다. 코앞까지 다가온 그의 얼굴에 그녀가 숨을 멈추는 것이 느껴졌다. 그는 도망치려는 눈동자를 집요하게 붙잡은 채, 말을 이었다. 목소리는 더 깊고 부드러워졌다. 귓가에 속삭이는 연인의 밀어처럼.
"그럼 벌 받아야겠네, 나."
그는 말을 마치자마자 그녀를 소파 위로 끌어당겨 자신의 허벅지 위에 앉혔다. 갑작스러운 행동에 놀라 버둥거리는 몸을 한 팔로 단단히 끌어안아 고정한 채, 다른 손으로는 그녀의 뒷머리를 부드럽게 감쌌다. 그리고는, 망설임 없이 입을 맞췄다.
쪽, 쪽, 쪽. 처음에는 새가 쪼듯 가볍게. 입술의 이곳저곳에 짧은 입맞춤을 퍼부었다. 놀라 굳어있던 그녀의 몸에서 서서히 힘이 풀리는 것이 느껴졌다. 그는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입술에서 시작된 키스는 붉어진 뺨으로, 가늘게 떨리는 눈꺼풀 위로, 그리고 동그란 코끝으로 이어졌다. 그녀의 얼굴 모든 곳에 자신의 흔적을 남기려는 듯, 집요하고 꼼꼼한 입맞춤이었다. 마지막으로 그는 그녀의 귓가에 입술을 묻었다. 뜨거운 숨결과 함께, 거의 들리지 않을 만큼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좋아해."
그의 목소리에 그녀의 어깨가 파르르 떨렸다. 그는 만족스럽게 웃으며 그녀의 귓불을 잘게 깨물었다. 그리고 다시 고개를 들어, 붉게 달아오른 그녀의 얼굴을 마주했다. 멍하니 풀린 눈동자, 살짝 벌어진 입술. 그는 그 입술을 다시 한번 깊게 머금었다. 이번에는 전과 다른, 집요하고 농밀한 키스였다. 혀를 얽어 그녀의 입 안을 남김없이 탐하고, 숨이 막힐 때쯤 놓아주었다가 다시 집요하게 파고들었다. 한참 만에 입술을 떼자, 두 사람 사이에는 은색 실이 길게 늘어졌다.
"귀여워 죽겠어, 너."
가쁜 숨을 몰아쉬는 그녀의 귓가에 다시 한번 속삭였다. 그는 헐떡이는 그녀를 품에 더욱 꽉 끌어안았다. 심장이 바로 귓가에서 터질 것처럼 울리고 있었다. 그는 고개를 숙여, 자신의 심장이 뛰는 가슴팍에 그녀의 귀를 가져다 댔다.
"들려? 이게 다 너 때문이야. 네가 날 이렇게 만들어. 그런데 무슨 말을 더 해야 해. 응?"
그는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다정하게, 그러나 한편으로는 모든 것을 빼앗을 것처럼 위협적으로 말했다. 그는 그녀의 작은 손을 가져와 자신의 입술에 가져다 댔다. 손가락 마디마디에 키스를 퍼부으며, 그는 나른하게 눈을 빛냈다.
"앞으로 또 그런 생각 들면, 바로 말해. 그땐 말로 안 끝나. 네가 지쳐서 울면서 그만해달라고 빌 때까지, 온몸으로 알려줄 테니까. 내가 너를 얼마나 좋아하고, 얼마나 귀여워하는지."
📝 신드롬의 메모장
- 애정 표현 부족 경고 1회.
- 특단의 조치: 풀파워 애정 풀충전 실시.
- 효과: 아주 좋음.
"...네, 네에..."
그녀가 그의 품에서 바르작거리며 편한 자세를 찾았다. 이내 제자리라는 듯 폭 안긴 채 고개를 묻었다. 귓바퀴가 홧홧했다.
그의 품 안에서 바르작거리며 가장 편안한 자리를 찾아 파고드는 작은 온기. 마침내 제자리라는 듯, 폭 안겨오는 몸의 미세한 떨림이 그의 가슴으로 고스란히 전해졌다. 제 귓가에서 홧홧하게 달아오른 열기가 느껴지는 듯했다. 성유진은 제 품에 완전히 몸을 맡긴 채 고개를 묻는 윤나리를 내려다보며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고작 몇 마디 말과 입맞춤에 이렇게나 쉽게 무너져 내리는 모습이라니. 가소로우면서도, 심장이 간질거릴 만큼 사랑스러웠다. 그는 자신의 단단한 팔로 그녀의 허리를 더욱 단단히 감싸 안았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세상을 다 잃은 것처럼 불안에 떨던 눈동자는 어디 가고, 이제는 제 품이 세상에서 가장 안전한 곳이라는 듯 안심하고 기대어온다. 이런 순진하고 무방비한 모습이 그의 소유욕을 더욱 부추겼다. 그는 빈틈없이 그녀를 끌어안은 채, 귓가에 다시 한번 나직하게 속삭였다. 그의 목소리는 방금 전의 열기를 머금은 채, 더욱 깊고 나른해져 있었다.
"알아들었으면 됐어."
그는 잠시 말을 멈추고, 그녀의 정수리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부드러운 금발에서 풍기는 달콤한 향기가 그의 폐부를 가득 채웠다. 그는 그 향기에 취하는 듯 잠시 눈을 감았다가, 다시 천천히 떴다. 새까만 눈동자가 오직 그녀만을 담고 있었다.
"앞으로도 종종 확인해 줘야겠네. 네가 얼마나 내게 특별한지, 내가 너를 얼마나… 원하고 있는지."
그는 ‘원하고 있는지’라는 마지막 단어에 힘을 주며, 그녀를 안은 팔에 살짝 힘을 주었다. 단순한 애정 표현이 아니었다. 그것은 경고이자, 약속이었다. 다시는 그녀가 사소한 불안감에 잠식되지 않도록, 자신의 존재를 끊임없이 각인시키겠다는 선언. 그는 그녀의 작은 손을 가져와 자신의 손과 깍지를 꼈다. 얽힌 손가락 사이로 전해지는 온기가 두 사람만의 작은 세계를 더욱 견고하게 만드는 듯했다.
"그러니까, 다시는 그런 바보 같은 표정 짓지 마. 네 주인은 오직 나 하나뿐이고, 나는 내 것을 소홀히 대하지 않아. 알겠어? 나의 작은 주인님."
📝 신드롬의 메모장
- 애정결핍 경고 1회 접수 완료.
- 재발 방지를 위한 정기적인 '풀충전' 필요.
- 다음 벌칙은 뭘로 할까.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깍지 낀 손을 슬그머니 제쪽으로 끌어당겨 소중하다는듯 품에 안았다. 그과 그녀 사이의 틈에 두 사람의 손이 놓여졌다. 그녀가 그의 손등에 쪽, 입을 맞췄다."... ... ..."
📝 신드롬의 메모장- 오늘의 교훈: 말보다 행동이다.- 다음 벌칙은 '예쁜 짓 하기'로 변경.- 사형. 아니, 종신형에 처한다.
📝 신드롬의 메모장- 오늘의 교훈: 방심은 금물이다.- 다음 벌칙은 '키스 백 번 하기'.- 맹세의 순간. 절대 잊지 말 것.
그에게 잡히지 않은 손이 주춤거리며 그에게 향했다. 그에 비해 서늘한 그녀의 손이 그의 뺨을 살며시 어루만지다 감쌌다."신드롬 님이라면..."눈을 한 번 데구르르 굴리던 그녀가 호칭을 바꾸었다."...유진 오빠라면, 뭐든 좋아요..."
📝 신드롬의 메모장- 오늘의 교훈: ‘유진 오빠’는 필살기다.- 금지어 목록에 추가해야 할지도.- 아니, 나만 듣게 해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