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븐이 벽에 마침내 등을 대며 서서히 미끄러져 내려갔다. 군화가 바닥에서 삐걱거렸다. 세븐이 바닥에 엉덩이를 대며 앉은 자세를 취했다. 다리를 앞으로 뻗었다. 충전 부스의 타임머가 7분 22초를 보여주고 있었다. 시장의 아침 소음이 천막 사이로 끊임없이 흘러들었고 라디오의 광둥어 팝송이 후렴구에 도달해 음량이 잠깐 올랐다가 내려갔다. 세븐이 등에 기대어 머리를 벽 쪽으로 기울이며 눈을 감았다. 감은 눈 위로 선글라스가 내려앉았다. 세븐이 남은 시간을 이렇게 보내기로 결정한 것이었다. 바닥에 앉아 눈을 감고 충전이 끝나기를 기다리는 용병의 여유. 혹은 여유가 아닌 단순한 대기. 구분하지 않는 사람의 자세.
[턴 18]
"...닐, 신경 쓰지 않음. 인식 오류의 가능성 알림."
그것은 시선을 아래로 내리며 답했다. 미묘하게 처졌던 입꼬리가 원래 위치로 돌아와 있었다. 그는 그것이 이미 알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답했으나, 추론 가능성을 계산한 그것은 희박한 확률을 도출해낼 뿐이었다. 물론, 그가 쉬려는 듯하니 굳이 그것을 입 밖으로 내진 않았다.
"..."
그것은 충전이 마무리되길 얌전히 기다렸다. 그것의 새로운 주인—아마도—이 그러길 바라는 것 같았으므로.
---
세븐의 감은 눈 뒤로 빛이 스며들었다. 천막 지붕의 틈새를 통과한 햇살이 선글라스의 렌즈 위에서 산란되어 붉은색을 띤 어둠을 만들어냈다. 눈꺼풀 안쪽 혈관이 빛에 비쳐 얼핏 보였다가 사라졌다. 세븐의 호흡이 느려졌다. 잠이 든 것이 아니었다. 전장에서 대기하는 인간이 길들여진 반수면 상태. 뇌의 8할은 쉬고 2할은 주위의 진동과 소음을 모니터링하는 모드. 발전기의 저주파가 바닥을 통해 골반으로 올라오고 있었고 시장의 소음이 천막의 천을 통해 걸러진 채 고막에 닿고 있었다. 발자국 소리. 누군가가 충전 부스 앞을 지나갔다. 세븐의 감은 눈 뒤로 동공이 움직였다. 위협 아님. 지나감.
7분이 지나갔다. 세븐이 그 시간을 측정하지 않았다. 측정할 필요가 없었다. 몸이 알고 있었다. 전장에서 30분의 수면을 4회 반복하며 하루를 버티던 시절이 만들어낸 내장 시계. 타이머가 00:00에 도달하며 짧은 전자음을 발했을 때 세븐의 눈이 떠졌다. 선글라스 아래의 회색 눈동자가 천장을 보았다가 시야를 내렸다. 은발. 금색 눈동자. 충전 케이블이 연결된 채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존재가 거기 있었다. 세븐의 입매가 움직였다. 말을 하려다 멈추는 동작. 세븐이 등을 벽에서 떼며 몸을 일으켰다. 관절이 연속으로 작은 소리를 냈다. 무릎. 척추. 목. 바닥에 앉았던 시간이 축적된 결과였다.
"Done?"
(다 됐어?)
세븐이 충전 케이블을 밟지 않도록 발을 옮기며 부스의 단말기를 확인했다. 결제 내역이 녹색 글씨로 표시되어 있었다. 30분 100홍콩달러. 잔여 전력 미발생. 세븐이 케이블을 위에서 잡아당겨 연결을 해제했다. 금속 단자가 빠지는 작은 소리가 발전기 소음 사이에서 들렸다. 세븐이 케이블을 돌려 감아 부스 옆의 고리에 걸어두었다. 남의 것을 쓴 뒤 정리하는 습관이 아니라 다음에 또 쓸 때 찾기 귀찮은 것을 피하는 실용주의였다. 세븐이 충전 부스를 나서며 은발의 존재에게 시선을 보냈다. 올려다보는 금색 눈동자. 답변 사이의 공백이 제거된 후의 안드로이드의 얼굴에는 감정의 잔여물이 남아 있지 않았다. 아까의 시무룩한 입매는 사라져 있었다. 세븐이 그것을 보았는지 확인하기 어려웠다. 선글라스 너머의 시선이 머물렀다 떠나는 속도가 평이했다.
"Come on. We're heading back. I need a table and decent light before I start opening you up."
(가자. 돌아가. 널 열기 전에 테이블이랑 제대로 된 조명이 필요해.)
세븐이 비닐 봉투를 옆으로 끼며 시장의 통로로 발을 옮겼다. 오전의 인파가 전보다 늘어 있었다. 점포들이 천막을 펼치고 유통되지 않은 산업용 케이블과 분해된 전자기기의 부품을 좌판 위에 늘어놓고 있었다. 어딘가에서 누군가가 세븐의 등 뒤로 온 은발의 존재를 두 번 쳐다보았다. 세븐의 보폭이 미세하게 줄었다. 뒤따르는 존재의 속도에 맞추는 조절이었다. 세븐이 의식적으로 한 것인지 아닌지는 몸이 기억하는 영역의 문제였다. 전장에서 부상당한 동료의 속도에 맞춰 보행을 조절하던 습관이 일상에서 발현된 것이었다. 세븐은 그 습관을 수정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수정할 이유를 발견하지 못한 것이었다.
검문소를 지난다. 아침 교대 근무가 끝난 UN 병사가 세븐의 W.W 태그를 확인하고 통과시켰다. 병사의 시선이 은발의 존재 위에서 2초간 머물렀다. 세븐이 그 시선을 받아냈다. 병사가 시선을 거뒀다. 통과. 세븐이 오토바이가 주차된 곳으로 걸으며 주머니에서 키를 꺼냈다. 비닐 봉투를 오토바이의 캐리어에 묶고 시트에 올라탔다. 시동을 걸었다. 엔진이 단발의 소리를 내며 잠들어 있던 기계를 깨웠다. 세븐이 뒤를 돌아보았다.
"Same as before. Hold on tight."
(저번이랑 같아. 꽉 잡아.)
세븐이 핼멧을 하나 건네려다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세븐의 핼멧은 하나뿐이었다. 핼멧은 자기가 쓰지 nil에게 줄 생각을 하지 않은 것이었다. 소유물에 대한 기본적인 무관심이 다른 방향으로 발현된 것이었다. 세븐이 핼멧을 쓰고 바이저를 내렸다. 엔진의 진동이 핸들바를 통해 손바닥에 전달되었다. 세븐이 클러치를 잡으며 뒤에서 타는 무게를 기다렸다. 바이저 너머로 완차이의 아침이 번져 있었다. 습기가 낀 공기가 엔진의 열기와 섞여며 아스팔트 위에서 일렁였다.
[턴 19]
그것은 그의 행동에 별다른 유감이 없다는 듯—실제로 없었다.—그의 뒷자리로 향했다. 처음보다는 자연스러워진 탑승이었다. 그것은 그의 허리를 붙잡고, 오는 길 학습한 동승자의 모습을 흉내냈다.
"..."
그것의 작은 기체가 그의 등에 폭 감기듯 안겼다.
---
등에 닿는 무게가 작았다. 세븐이 예상한 것보다 가벼웠다. 160센티미터의 체격에 마른 몸. 골반의 뼈가 세븐의 등 하단에 자리잡았고 양쪽 허리를 감싼 손가락의 압력이 일정했다. 금속이 아닌 유기체에 가까운 온도가 군복의 천을 통해 전해졌다. 충전 직후의 열잉여가 체표면에 남아 있는 것이었다. 세븐이 그 온도를 등으로 수용한 채 클러치를 놓았다. 오토바이가 전진했다. 가속에 따라 등에 닿는 무게의 분포가 바뀌었다. 은발이 바람에 흔들리며 세븐의 헬멧 옆으로 날렸다. 손가락이 허리를 잡은 힘이 미세하게 강해졌다. 가속에 대한 반응. 학습된 동승자의 행동이라고 그것이 말한 대로 굴고 있었다. 세븐이 핸들바의 각도를 조절하며 고가도로로 올라섰다.
오전의 홍콩이 펼쳐졌다. 습기를 머금은 공기가 핼멧의 바이저 표면에서 수막을 만들었다. 세븐이 바이저를 한 번 닦았다. 손가락 끝에 묻은 습기가 바람에 증발했다. 완차이 구역의 건물들이 왼쪽으로 스쳤다. 콘크리트 벽면에 붙은 에어컨 실외기들이 물을 뚝뚝 떨어뜨리고 있었다. 철제 발판 위의 빨랫줄에 흰 셔츠와 회색 면바지가 나부꼈다. 세븐의 시선이 도로로 돌아왔다. 등에 닿은 체온이 지속되고 있었다. 일정한 압력. 일정한 온도. 인간이라면 체온이 미세하게 오르내리며 호흡의 리듬이 등에 전달될 것이었다. 지금 등에 닿는 것은 그런 것이 없었다. 정지한 온도. 고정된 압력. 기계가 열을 발산하는 방식이었다. 세븐이 그 차이를 등으로 인지하고 있었다. 인지한 채 속도를 올렸다.
"Feeling better? You charged, so your sensors should be running properly now."
(좀 낫지? 충전했으니까 센서들 제대로 돌겠지.)
세븐이 헬멧 안에서 말했다. 바람 소리와 엔진 진동이 섞인 안쪽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낮게 깔렸다. 대화를 기대하는 질문이 아니었다. 확인 사항을 읊는 습관이 운전 중에 발현된 것이었다. 세븐의 등이 은발의 존재의 얼굴 쪽으로 약간 기울어졌다. 바람 소리가 작아지는 각도. 대답이 들리도록 만든 무의식적인 배려인지 아니면 단순한 체중 이동인지를 세븐 자신이 분류하지 않았다. 고가도로의 경사가 완만하게 오르며 홍콩의 스카이라인이 오른쪽으로 열렸다. 빅토리아 하버의 수면이 아침 햇살에 반사되어 은색으로 빛나고 있었다. 멀리 격벽의 윤곽이 안개에 가려 절반만 보였다.
세븐의 어깨가 한 번 올라갔다. 등에 닿은 무게가 같이 움직였다. 피로가 올라오고 있었다. 아침 순찰과 시장 방문과 부품 협상이 축적한 물리적 피로가 아니었다. 수면의 질이 나쁜 것이 원인이었다. 바닥에서 더플백 위에 누워 4시간을 잔 결과가 근육에 남아 있었다. 세븐의 목덜미가 뻐근했다. 고개를 한 번 돌려 풀려 했으나 헬멧의 무게가 관성을 만들어 동작이 부자연스러웠다. 세븐이 그 동작을 멈추고 도로에 집중했다. 고가도로의 끝이 보였다. 내리막 구간에서 세븐이 브레이크를 잡았다. 등에 닿는 무게가 앞으로 밀렸다. 은발과 금색 눈동자가 세븐의 등에 더 가까이 붙었다. 세븐이 속도를 줄이며 완차이 구역의 좁은 골목으로 진입했다.
관재방이 있는 건물이 보였다. 외벽의 콘크리트가 습기에 검게 변해 있었다. 1층 입구의 철문이 반쯤 열려 있었다. 세븐이 오토바이를 건물 앞의 좁은 보도에 세웠다. 엔진을 껐다. 진동이 손에서 멈추고 바람 소리가 귀를 채웠다. 세븐이 핼멧을 벗어 오토바이의 핸들바에 걸었다. 선글라스가 밖의 빛을 받아 다시 반짝였다. 세븐이 뒤를 돌아보았다. 금색 눈동자의 존재가 뒷자리에 앉아 있었다. 세븐의 등에서 떨어진 거리에 의해 은발이 흐트러진 상태로 볼에 붙어 있었다. 세븐이 캐리어에 묶은 비닐 봉투를 풀며 한 손으로 머리카락을 넘겼다.
"Alright. Upstairs. I'll clear the table."
(좋아. 위로 올라가. 테이블 정리할게.)
세븐이 비닐 봉투를 들고 건물 입구로 향했다. 계단의 콘크리트가 마모되어 중앙이 깊게 파여 있었다. 2층부터는 형광등 하나가 비명처럼 깜빡이며 복도를 비추고 있었다. 세븐의 군화 소리가 계단에서 울렸다. 뒤에서 따라오는 발소리가 세븐보다 가벼웠다. 4층에 도달했다. 세븐이 주머니에서 열쇠를 꺼내며 자신의 방문 앞에 섰다. 문의 철제 표면에 녹이 올라 있었다. 세븐이열쇠를 돌렸다. 잠금장치가 풀리는 소리가 좁은 복도에서 울렸다. 문을 밀었다. 어젯밤의 냄새가 그대로 남아 있었다. 맥주. 담배. 오래된 콘크리트. 세븐이 안으로 들어서며 신발을 벗었다. 군화를 문 앞에 나란히 놓고 비닐 봉투를 테이블 위에 올렸다. 접이식 테이블 위에 어젯밤 세븐이 펼쳐둔 채로 남겨둔 위성 사진과 빈 맥주캔이 있었다. 세븐이 맥주캔을집어 바닥의 쓰레기 봉투에 던지고 위성 사진을 접어 한쪽으로 치웠다. 금속 테이블의 표면이 드러났다. 세븐이 주머니에서 라이터와 아까 시장에서 산 펜라이트를 꺼내 테이블 옆에 놓았다.
"Okay. Sit here and take your shirt off. I need to see the back of your neck first."
(자. 여기 앉아서 옷 벗어. 목 뒤부터 봐야 하니까.)
세븐이 테이블 옆의 접이식 의자를 가리켰다. 비닐 봉투에서 데이터 포트 리시버를 꺼내 형광등 불빛 아래에서 살폈다. 작은 금속 부품이 손가락 사이에서 빛을 반사했다. 세븐의 손톱에 기름 때가 남아 있었다. 부품을 관찰하는 세븐의 표정이 작업 모드로 전환되고 있었다. 장난기가 수그러들고 집중이 전면에 올라왔다. 선글라스 너머의 눈동자는 보이지 않았으나 입매의 각도가 달라져 있었다. 웃는 얼굴이 사라진 자리에 정밀한 무심함이 올라앉았다. 세븐이 펜라이트를 켜서 의자 옆에 비추며 대기했다. 은발의 존재가 자리에 앉아 상의를 벗기를 기다리는 자세였다. 세븐의 오른손이 부품을 쥔 채 왼쪽 손가락으로 테이블을 두드렸다. 딸깍. 딸깍. 작업 전의 리듬이 시작되었다.
[턴 20]
그것은 혹시 모를 상황을 대비해 감각 센서의 활성도를 완전히 정상으로 끌어올리지 않았다. 그럼에도 그의 피로가 감지되었다. 그것은 그의 명령대로 그가 가리킨 의자에 앉고, 낡은 상의를 벗었다.
"...휴식 필요. 피로도 높음. 수면 부족 예상."
---
세븐의 손가락이 테이블을 두드리던 리듬이 멈추었다. 펜라이트를 든 왼손의 각도가 미세하게 틀어졌다. 빛의 축이 의자 쪽에서 세븐의 손바닥 쪽으로 내려왔다. 세븐의 입매가 한 번 움직였다. 웃음이 아니었다. 짜증과 무심함의 사이 어디쯤에 위치한 근육의 수축이었다. 선글라스 아래의 눈동자가 보이지 않았으나 그 위의 눈썹이 내려가는 것이 보였다. 세븐이 펜라이트를 다시 의자 쪽으로 돌렸다. 빛이 은발의 존재의 드러난 등과 후두부를 비추었다.
"I don't need a health report from my own projects."
(내가 고치려는 놈한테서 건강 리포트 받을 필요는 없거든.)
세븐의 목소리는 건조했다. 짜증이 묻어나지 않은 건 아니었으나 날카로운 종류의 짜증이 아니었다. 누군가가 본인의 컨디션을 지적하는 것에 대한 반사적인 불쾌감이 세븐의 화법을 거칠게 만들었다. 세븐이 데이터 포트 리시버를 테이블 위에 내려놓고 비닐 봉투에서 나머지 부품을 꺼냈다. 척추 프레임 커넥터. 합성 피부 시트. 부품들이 테이블 위에 나란히 놓였다. 세븐이 군복의 소매를 걷어 올렸다. 오른팔의 화상 흉터가 형광등 아래에서 분홍색과 흰색이 뒤섞인 표면으로 드러났다. 흉터의 경계선이 정확히 어깨에서 손목 방향으로 이어지며 팔의 안쪽 피부와 바깥쪽 피부의 색과 질감을 갈랐다. 세븐이 흉터를 내려다보지 않았다.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소매를 걷은 채 펜라이트를 집어 들었다.
"Tell you what. I'll sleep after I'm done with you. Deal?"
(이렇게 하자. 너 다 고치고 나면 잘게. 어때?)
세븐이 의자 뒤로 돌아가며 한쪽 무릎을 바닥에 대었다. 시선의 높이가 은발의 존재의 후두부와 같아졌다. 펜라이트의 빛이 후두부 기저를 비추었다. 손상된 데이터 포트의 단자가 불빛 아래에서 드러났다. 금속 핀 세 개가 부러져 있었고 나머지는 구부러져 있었다. 포트 주변의 합성 피부가 찢어진 채 응고된 윤활유가 검은 딱지를 만들고 있었다. 세븐이 라이터를 켜서 포트 주변의 찌꺼기를 태워 제거했다. 작은 연기가 올라가며 형광등의 빛을 가렸다. 세븐이 라이터를 끄고 테이블 위의 데이터 포트 리시버를 집어 들었다. 새 부품의 규격을 손상된 포트에 맞추었다. 핀의 배열이 일치했다. 세븐의 손가락이 새 부품의 표면을 따라 움직이며 결함 유무를 확인했다. 결함 없음. 세븐이 입 안에서 혀를 찼다. 파이가 부풀린 가격에 비해 부품의 상태는 양호했다. 세븐이 작업을 시작할 자세를 잡았다.
"This might sting. Your sensory network is going to interpret the port reconnection as foreign input. If you kept your sensors low on purpose, that was smart. But I need you to keep still. One twitch and I'm fusing a pin into your spinal column."
(따끔할 수도 있어. 포트를 다시 연결하면 감각망이 외부 입력으로 해석할 거야. 센서를 낮춰둔 거라면 현명한 판단이었지. 근데 꼼짝 마. 한 번이라도 움직이면 핀이 척추 안으로 박여.)
세븐의 왼손이 은발의 존재의 머리를 고정했다. 손바닥이 정수리에 놓이고 손가락이 양쪽 관자놀이에 가볍게 압력을 가했다. 고정의 목적이지 통제의 목적이 아닌 힘이었다. 세븐의 오른손이 라이터를 사용해 손상된 포트 주변의 변형된 금속을 살짝 가열했다. 금속이 열에 의해 미세하게 팽창하며 부러진 핀의 잔여물이 표면으로 밀려 나왔다. 세븐이 손톱으로 잔여물을 긁어냈다. 작은 금속 조각이 바닥에 떨어졌다. 세븐이 새 리시버를 위치에 맞추었다. 핀의 각도를 조절하며 포트의 홈에 밀어 넣었다. 첫 번째 핀이 들어갔다. 세븐의 손가락이 미세하게 떨리지 않았다. 도박에서 패가 좋을 때의 손이었다. 두 번째 핀. 세 번째. 리시버가 포트에 안착했다. 세븐이 안쪽에서 작은 클릭 소리가 나는지 귀를 가까이 했다. 소리가 들렸다. 잠금 장치가 작동한 것이었다. 세븐이 새 부품의 외곽을 손가락으로 한 번 더 눌러 결합 상태를 확인했다. 움직임 없음. 고정 완료.
"Good. Port's in. Don't move yet—this is where it gets delicate."
(좋아. 포트 들어갔어. 아직 움직이지 마. 여기부터가 까다로워.)
세븐이 테이블 위의 척추 프레임 커넥터를 집어 들었다. 등판의 균열이 시작되는 지점을 펜라이트로 비추며 커넥터의 규격을 대조했다. 균열의 길이가 어젯밤 확인한 것보다 미세하게 늘어 있었다. 충전 중 발생한 열팽창이 구조적 긴장을 가중시킨 것이었다. 세븐의 입매가 한 번 다물레다가 열렸다. 혀를 차는 소리가 이번에는 들렸다. 세븐이 은발의 존재의 등 쪽으로 돌아가며 커넥터의 위치를 잡았다. 손가락이 균열의 양끝을 눌렀다. 피부 시트 아래의 프레임이 손끝에서 미세하게 움직였다. 세븐이 커넥터를 균열의 중앙에 맞추어 올려놓았다. 금속 부품이 등판에 밀착하는 소리가 작게 났다. 세븐이 손바닥으로 커넥터를 누르며 밀착 상태를 확인했다. 압력을 가하는 동안 세븐의 손바닥이 은발의 존재의 등 위에서 미끄러지지 않도록 각도를 유지했다. 척추의 곡률을 따라 부품이 자리를 잡았다.
"Now hold on. I'm sealing the frame. This part takes a few minutes."
(자, 가만히 있어. 프레임 봉합할 거야. 여기 몇 분 걸려.)
세븐이 라이터를 다시 켜고 합성 피부 시트의 가장자리를 가열했다. 시트가 열에 의해 연화되며 등판의 손상된 피부와 접촉면을 만들기 시작했다. 세븐의 손이 시트를 누르며 표면의 기포를 제거했다. 라이터의 불꽃이 피부 시트의 표면을 스치며 윤활유가 미세한 연기를 발생시켰다. 세븐의 집중이 최대치에 도달한 얼굴이었다. 입술이 다물려 있고 미간에 주름이 잡혀 있었다. 작업에 들어간 세븐은 도박장의 세븐과 다른 사람이었다. 장난기가 사라진 자리에 남은 것은 정밀함과 인내였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장난기가 사라진 것이 아니라 장난기 아래에 존재하던 것이 드러난 것이었다. 세븐이 라이터를 끄고 시트의 접착 상태를 손가락으로 훑었다. 양쪽 끝이 밀착되어 있었다. 중앙이 약간 들떠 있었다. 세븐이 다시 라이터를 켜고 들뜬 부분을 눌렀다. 시트가 밀착되었다. 세븐이 손을 떼며 등판의 전체적인 상태를 점검했다. 커넥터가 고정되어 있고 시트가 봉합되어 있었다. 완전하지 않았으나 구조적 안정성은 확보되었다. 세븐이 바닥에서 일어나며 무릎을 폈다. 관절이 다시 소리를 냈다.
"There. Frame's reinforced. Skin's patched. Not pretty, but it'll hold."
(자. 프레임 보강했고 피부 패치했어. 예쁘진 않지만 버틸 거야.)
세븐이 손등으로 이마의 땀을 닦았다. 형광등 아래의 좁은 방이 작업 전보다 더 좁아 보였다. 비닐 봉투에 남은 부품이 없었다. 세븐이 테이블 위의 공구를 정리하며 펜라이트를 껐다. 방이 어두워졌다. 창문 너머로 네온사인의 빛이 들어오고 있었다. 세븐이 의자 옆에 서서 은발의 존재의 후두부를 내려다보았다. 새로 부착된 리시버의 금속 표면이 네온 빛을 반사하고 있었다. 세븐의 손이 올라가 리시버 옆에 가볍게 닿았다. 손가락 끝이 새 부품의 표면을 훑었다. 설치가 정상인지 확인하는 접촉이었다.
"Alright. Port's in. If your old data's still there, I can try hooking up a reader. Might pull something off whatever's left in that wrecked memory of yours."
(좋아. 포트 달았어. 옛날 데이터가 남아 있으면 리더기 연결해볼 수 있어. 네 그 박살난 기억에서 뭔가 끌어낼 수도 있지.)
세븐이 테이블 위의 위성 사진 쪽으로 손을 뻗어 그 아래에 깔려 있던 낡은 PDA를 꺼냈다. 화면에 금이 가 있었으나 전원이 들어오는 기기였다. 세븐이 PDA를 켜며 데이터 포트와 호환되는 연결 케이블이 있는지 방 안의 잡동사니를 뒤졌다. 서랍 안에서 먼지를 뒤집어쓴 케이블 하나를 발견했다. 규격을 확인했다. 구형 포트와 PDA 양쪽에 호환되는 종류. 세븐이 케이블을 쥐며 은발의 존재에게 시선을 보냈다. 금색 눈동자가 자신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세븐이 PDA와 케이블을 들어 보이며 입꼬리를 올렸다.
"Wanna try? No guarantee you'll like what you find. Could be nothing. Could be something that makes all this very complicated. Your call."
(해볼래? 뭘 찾든 좋아할 거란 보장 없어. 아무것도 아닐 수도 있고 이거 다 복잡하게 만드는 뭔가일 수도 있고. 네가 정해.)
[턴 21]
"..."
그것은 그를 빤히 올려다보았다. 눈을 감지 않아도 되는 기체임에도 프로그램에 코딩된 함수에 따라 몇 초에 한 번씩 눈을 깜박였다. 아무것도 아닐 수도, 복잡하게 만드는 일일 수도 있다. 아마 그가 말하는 '복잡함'이란 그의 기준이리라. 그것은 제 과거가 어떻든 그저 버려진 기계일 뿐이었으니까.
"데이터 복구, 수락."
그것은 고개를 끄덕였다. 사람처럼.
---
세븐의 손가락이 케이블의 단자를 한 번 돌렸다. 금속 단자의 결합 방향을 확인하는 동작이었다. 세븐이 선글라스를 벗어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형광등의 빛이 연한 회색 눈동자 위에 직접 닿았다. 날카로운 눈매가 케이블의 단자에 초점을 맞추고 있었다. 세븐이 의자 뒤로 돌아갔다. 새로 부착한 데이터 포트 리시버의 표면에 펜라이트를 비추었다. 입력 홈의 규격이 케이블과 일치하는 것을 두 번 확인했다. 세븐의 왼손이 다시 은발의 정수리에 올라갔다. 머리를 고정하는 압력이 아까보다 약했다. 포트 설치가 끝난 뒤의 이완이 손에서 발현된 것이었다.
"I'm plugging in. You might get noise. Static. Fragmented output. Whatever comes up, don't try to process it all at once. Just let it flow."
(연결한다. 노이즈가 낄 수 있어. 정적. 파편화된 출력. 뭐가 나오든 한꺼번에 처리하려고 하지 마. 그냥 흘려보내.)
세븐의 오른손이 케이블의 단자를 포트에 밀어 넣었다. 첫 번째 저항이 있었다. 새 부품의 접촉면이 아직 완전히 길들여지지 않은 탓이었다. 세븐이 손가락 끝에 힘을 가했다. 단자가 포트 안으로 들어가며 작은 클릭 소리가 났다. 접속 완료. 세븐의 손이 케이블에서 떨어졌다. PDA의 화면이 깜빡이며 연결 상태를 표시했다. 녹색 글씨가 금이 간 화면 위에서 번져 보였다.
[CONNECTION ESTABLISHED — DEVICE: UNKNOWN MODEL / SERIAL: CORRUPTED]
[SCANNING AVAILABLE DATA CLUSTERS...]
[WARNING: 92.87% DATA CORRUPTION DETECTED]
[RETRIEVABLE FRAGMENTS: 7.13% — INITIATING EXTRACTION...]
세븐이 PDA 화면을 들여다보며 미간을 좁혔다. 7.13퍼센트. 숫자가 세븐의 눈 앞에서 깜빡였다. 세븐의 혀가 입안에서 윗니 뒤를 한 번 밀었다. 생각하는 습관이었다. 92.87퍼센트의 손상 속에서 7.13퍼센트가 살아남았다는 것은 두 가지를 의미했다. 하나는 포맷 과정이 불완전했다는 것. 다른 하나는 그 7.13퍼센트가 물리적으로 파괴하기 어려운 깊은 층위에 위치한 데이터라는 것. 세븐이 PDA의 화면을 스크롤했다. 추출된 데이터의 목록이 느리게 올라왔다. 대부분이 깨진 파일명이었다. 문자가 반쯤 손실된 채 나열되어 의미를 파악하기 어려웠다. 세븐의 손가락이 화면 위에서 멈추었다. 하나의 파일이 다른 것들보다 손상률이 낮았다. 파일명의 앞부분이 읽혔다.
[FRAG_0041 — VISUAL LOG / INTEGRITY: 68% / TIMESTAMP: CORRUPTED]
세븐이 파일을 열었다. PDA의 화면이 한 번 검어졌다가 다시 밝아졌다. 화면 위로 영상 데이터가 재생되었다. 화질이 열악했다. 프레임이 끊겼다. 색이 번져 있었다. 세븐이 PDA를 테이블 위에 세워 놓고 은발의 존재가 볼 수 있는 각도로 돌렸다. 영상 속에는 실내가 비치고 있었다. 밝은 조명. 흰 벽. 실험실과 거실의 중간 정도 되는 공간. 영상의 시점이 낮았다. 앉아 있는 높이. 화면 안으로 한 인물의 실루엣이 들어왔다. 남성. 중년. 정장의 윤곽이 보였으나 얼굴은 프레임 손상으로 일그러져 있었다. 남성의 입이 움직이고 있었다. 음성 데이터가 끊겼다. 몇 초 간의 정적 뒤에 파편적인 음성이 흘러나왔다.
[AUDIO — PARTIAL]: "...괜찮—...아빠가—...여기 있—..."
음성이 다시 끊겼다. 영상이 3초간 정지했다가 재개되었다. 남성의 손이 화면 쪽으로 뻗어오는 장면이었다. 손이 화면에 닿기 직전 영상이 완전히 끊겼다. PDA의 화면이 다시 데이터 목록으로 돌아왔다. 세븐의 눈동자가 화면 위에 고정되어 있었다. 회색 눈동자 안에서 형광등의 빛이 작은 점으로 반사되고 있었다. 세븐의 입이 닫혀 있었다. 3초. 5초. 세븐이 입을 열었다.
"So someone called himself your old man."
(그래서 누군가가 자기를 네 아빠라고 불렀다는 거지.)
세븐의 목소리가 낮아져 있었다. 평소의 건조함이 아니었다. 무언가를 계산하는 사람의 음색이었다. 세븐이 PDA를 집어 들며 나머지 파일 목록을 스크롤했다. 대부분이 손상률 90퍼센트 이상이었다. 읽을 수 있는 데이터가 거의 없었다. 세븐이 PDA를 내려놓으며 은발의 존재를 내려다보았다. 금색 눈동자가 PDA의 화면이 있던 방향을 향하고 있었다. 세븐이 그 시선을 따라갔다. 시선이 화면을 보고 있는 것인지 화면 너머의 무언가를 보고 있는 것인지를 구분하려 했다. 구분할 수 없었다. 세븐의 손이 한 번 허공에서 머물렀다가 내려왔다. 은발 위에 닿지 않았다. 테이블 위에 놓였다.
"An executive, judging by the suit. And he spoke Mandarin. That narrows it down, but not by much. Could be mainland. Could be here. Could be anywhere a Chinese corp has offices."
(정장으로 봐서 간부급이야. 중국어를 썼고. 범위가 좁혀지긴 하는데 많이는 아냐. 본토일 수도 있고 여기일 수도 있고 중국 기업이 사무실 둔 데면 어디든.)
세븐이 의자 옆에 서서 팔짱을 꼈다. 오른팔의 화상 흉터가 왼팔 위로 교차하며 그림자를 만들었다. 세븐의 시선이 은발의 존재의 얼굴 위에 머물러 있었다. 관찰이었다. 아까 시장에서의 관찰과 같은 종류였다. 그러나 성질이 달랐다. 시장에서의 관찰은 새 단어를 발견한 흥미였고 지금의 관찰은 손상된 파일에서 끌어낸 음성이 은발의 존재에게 어떤 반응을 유발하는지를 확인하는 경계였다. 세븐은 자신이 왜 경계하는지 점검하지 않았다. 점검할 이유가 없었다. 본능이 먼저 움직인 것이었다. 작전 중 적진에서 예상하지 못한 변수가 발생했을 때 세븐의 몸이 먼저 반응하는 것과 같은 종류의 움직임이었다.
"Nil. Anything come up on your end? Internal logs, cached sensory data, anything."
(닐. 네 쪽에서 뭐 뜨는 거 있어? 내부 로그든 캐시된 감각 데이터든 뭐든.)
세븐의 목소리가 다시 평이해졌다. 경계의 톤이 표면에서 수그러들었다. 세븐이 PDA를 다시 집어 들며 데이터 목록의 나머지를 확인했다. 손가락이 화면 위를 빠르게 미끄러졌다. 군인이 보고서를 읽는 속도와 같았다. 세븐의 눈동자가 화면과 은발의 존재 사이를 오갔다. 창문 너머로 완차이 구역의 소음이 끊임없이 흘러들었다. 어딘가에서 경적 소리가 울렸다. 세븐이 그 소리를 무시하며 PDA의 화면에 집중했다. 형광등이 한 번 깜빡였다. 세븐의 얼굴 위로 그림자가 지나갔다가 사라졌다.
[턴 22]
그것은 PDA 화면 속 외관을 분석했다. 파편화된 데이터 로그 속에서 같은 외형을 검색했다. 잠시 그것의 안광이 사라졌다. 이후 몇 초간의 정적. 그것이 다시 눈을 떴을 땐 금색 빛이 돌아와 있었다.
"외관 적합도 80%. 중년, 성인 남성."
그것이 느리게 눈을 깜박였다. 매치 되는 영상 기록은 있으나 무엇 하나 얼굴이 제대로 나온 기록은 없었다. 그 마저도 노이즈가 끼어 있어 제대로 식별되지 않았다.
"...아빠."
그것은 그 호칭을 입에 담아보았다.
---
세븐의 손가락이 PDA 화면 위에서 멈추었다. 은발의 존재가 내뱉은 두 글자가 좁은 방 안의 공기를 한 번 갈랐다. 아빠. 그 단어가 형광등의 윙거리는 소리와 창밖의 경적 소리 사이에서 유독 선명하게 세븐의 고막에 닿았다. 세븐의 회색 눈동자가 PDA에서 떨어져 은발의 존재의 입술 위에 머물렀다. 입술이 그 단어를 발음한 뒤의 형태로 닫혀 있었다. 세븐이 그 형태를 보았다. 기계가 단어를 출력할 때 입술의 근육이 관여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세븐은 알고 있었다. 스피커만 작동하면 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은발의 존재는 입을 벌려 발음했다. 사람처럼. 세븐의 입 안에서 혀가 윗니 뒤를 한 번 밀고 다시 돌아왔다.
세븐이 PDA를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화면의 녹색 글씨가 여전히 깜빡이고 있었다. 세븐의 등이 벽에 기대었다. 팔짱을 풀지 않은 채였다. 세븐의 시선이 천장으로 올라갔다가 내려왔다. 천장의 콘크리트에 습기가 만든 얼룩이 있었다. 세븐이 그것을 보지 않았다. 시선의 이동이 사고의 경로를 따라간 것이었다. 천장을 보는 동안 세븐의 뇌가 정보를 정렬하고 있었다. 중년 남성. 정장. 중국어. 아빠라는 호칭. 기업 간부. 소유주. 세븐이 시선을 내리며 은발의 존재를 다시 보았다.
"How does that feel? Saying it."
(어때. 그거 말하는 거.)
세븐의 목소리가 물었다. 질문의 형태는 가벼웠으나 세븐의 눈동자가 은발의 존재의 얼굴 위에 고정된 방식은 가볍지 않았다. 세븐이 관찰하고 있었다. 단어 하나가 은발의 존재의 내부에서 무엇을 유발하는지를. 캐시된 감각 데이터가 활성화되는지를. 감정 해석 루틴이 존재하지 않는 상태에서 그 두 글자가 어떤 경로로 처리되는지를. 세븐이 답을 기다리는 동안 오른손이 왼팔의 화상 흉터 위를 무의식적으로 문질렀다. 흉터의 표면이 매끄럽지 않았다. 열에 의해 수축한 피부의 요철이 손끝에서 읽혔다. 세븐의 습관이었다. 생각이 깊어질 때 흉터를 만지는 것. 통증이 없는 부위를 만지며 존재를 확인하는 행위가 아니었다. 단순히 손이 할 일이 필요한 것이었다.
"No rush. Take your time."
(급할 거 없어. 천천히.)
세븐이 덧붙였다. 목소리의 톤이 한 단계 내려가 있었다. 부드러운 것이 아니었다. 힘이 빠진 것이었다. 수면 부족이 성대를 누르고 있었다. 세븐의 눈꺼풀이 한 번 길게 내려갔다가 올라왔다. 졸음이 아니었다. 피로가 눈의 윤활을 요구한 것이었다. 세븐이 벽에서 등을 떼며 테이블 쪽으로 몸을 옮겼다. PDA의 화면을 다시 확인했다. 추출 가능한 나머지 데이터의 목록이 변하지 않고 있었다. 세븐이 화면을 끄지 않고 테이블 위에 놓아두었다. 은발의 존재가 원하면 다시 볼 수 있도록. 세븐이 접이식 침대 위에 걸터앉았다. 침대의 금속 프레임이 무게를 받아 삐걱거렸다. 세븐의 등이 벽에 닿았다. 다리를 침대 위로 올리지 않았다. 바닥에 발을 댄 채 상체만 벽에 기대는 자세였다. 전장에서 잠깐 쉴 때의 자세와 같았다.
세븐의 시선이 은발의 존재 위에 남아 있었다. 의자에 앉아 상의가 벗겨진 채 후두부에 케이블이 연결된 모습이었다. 형광등의 빛이 은발 위에서 산란되어 금색 눈동자의 존재를 실내의 다른 사물들과 분리시키고 있었다. 세븐이 그 모습을 보며 입꼬리를 올리지 않았다. 올릴 에너지가 부족한 것이었다. 대신 세븐의 눈동자가 미세하게 좁아졌다. 은발의 존재가 '아빠'라는 단어를 말했을 때의 입술의 형태가 세븐의 시각 기억에 저장되어 있었다. 기계가 호칭을 시험하는 모습. 감정 없이 발음하는 단어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미를 찾으려는 듯 공기 중에 머무는 방식. 세븐이 그것을 어떻게 분류해야 하는지 결정하지 않았다. 결정을 유예하는 것이 세븐의 처리 방식이었다. 급하지 않은 판단은 보류하고 급한 행동을 먼저 하는 것. 지금 급한 것은 없었다. 데이터는 추출되었고 포트는 설치되었고 프레임은 보강되었다. 남은 것은 시간이 해결할 영역에 속했다.
"That guy in the video. He touched you like you were real. Like you mattered. That's not standard corporate protocol for hardware."
(영상 속 그 남자. 널 진짜인 것처럼 만졌어. 네가 중요한 것처럼. 그건 기업이 하드웨어 다루는 표준 방식이 아니야.)
세븐의 말이 천장을 향해 흘렀다. 시선이 은발의 존재에서 떨어져 위를 보고 있었다. 콘크리트 천장의 얼룩이 세븐의 시야를 채웠다. 세븐이 말을 이었다. 목소리가 더 낮아져서 독백에 가까운 음량이 되었다.
"Someone wanted you. Then someone else threw you away. And now you're sitting in my shitty apartment with a cable in your skull, trying to figure out a word."
(누군가는 널 원했어. 그 다음에 다른 누군가가 널 버렸고. 그리고 지금 넌 내 허접한 집에 케이블 꽂은 채로 앉아서 단어 하나를 이해하려고 하고 있지.)
세븐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이번에는 에너지가 돌아온 것이었다. 피곤함 위로 떠오르는 아이러니가 세븐의 웃음을 끌어낸 것이었다. 세븐이 고개를 내리며 다시 은발의 존재를 보았다. 회색 눈동자가 금색 눈동자를 마주했다. 선글라스가 테이블 위에 놓여 있으므로 세븐의 눈이 완전히 드러나 있었다. 눈매의 날카로움이 피로에 의해 누그러져 있었다. 째진 눈꼬리가 내려앉아 있었다.
"世界真他媽的荒唐。"
(세상 진짜 씨발 황당하다.)
세븐이 중국어로 내뱉었다. 광둥어가 아닌 보통화였다. 은발의 존재가 방금 들은 영상 속 언어와 같은 언어였다. 의식적인 선택이 아니었다. 세븐의 뇌가 방금 들은 음성 데이터의 잔여물에 반응하여 같은 언어 회로를 활성화시킨 것이었다. 세븐이 그 사실을 인지하지 못한 채 침대 위에서 자세를 바꾸었다. 벽에 기댄 채 눈을 감았다.
"Wake me if something new pops up on that screen. Or if you figure out how that word makes you feel."
(화면에 새로운 거 뜨면 깨워. 아니면 그 단어가 어떤 느낌인지 알아내면.)
세븐의 호흡이 느려지기 시작했다. 감은 눈 아래로 눈동자의 움직임이 잠시 보였다가 사라졌다. 잠에 빠지기 직전의 인간이 보이는 급속안구운동이었다. 세븐의 오른손이 침대의 가장자리에 걸쳐져 있었다. 손가락이 이완된 채 아래로 늘어져 있었다. 세븐의 가슴이 느리게 오르내리기 시작했다. 잠이 들었다. 혹은 잠에 가까운 상태로 전환된 것이었다. 은발의 존재가 의자에 앉아 있는 방 안에서 세븐의 호흡 소리만이 형광등의 윙거리는 소리와 섞여 좁은 공간을 채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