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여섯 시. 세븐의 눈이 떠졌다. 한 번에, 단계적인 각성 과정 없이. 전장에서 길든 신체가 만들어낸 습관이었다. 눈꺼풀이 올라가자마자 동공이 축소되며 초점을 맞추었고, 현재 위치와 자세와 시간대를 0.5초 안에 재구성했다. 관재방. 4층. 완차이. 등이 벽에 붙어 있고 다리가 앞으로 뻗어 있으며 목이 왼쪽으로 꺾여 있었다. 목 근육이 뻣뻣했다. 그가 고개를 돌리려는 순간 왼쪽 어깨에 닿아 있는 무게를 인지했다.
가벼웠다. 사람의 무게가 아니었다. 머리 하나분의 하중이 어깨 위에 실려 있었고, 그 하중을 구성하는 것은 체온이 아니라 밀도였다. 은발이 그의 상완부 위로 흘러내려 있었다. 인간의 모발보다 균일한 굵기의 은색 직모가 검은 군복 위에 펼쳐져 있었고, 새벽빛이 창문을 통해 비스듬히 들어오면서 그 은색 위에 희미한 푸른 기운을 얹었다. 네온사인은 꺼져 있었다. 대신 홍콩의 이른 아침 특유의 연무가 낀 하늘이 창문 너머로 보였고, 그 탁한 빛이 방 안을 고르게 채우고 있었다.
세븐이 움직이지 않았다. 어깨 위의 무게를 인지한 뒤에도 몸을 빼지 않았다. 회색 눈동자가 천천히 왼쪽으로 내려와 어깨 위에 기대어 있는 은발의 정수리를 바라보았다. 눈이 감겨 있었다. 절전 모드. 그것이 마지막으로 내뱉은 단어였다. 인간이라면 잠이 들었다고 표현할 상태였으나, 이 존재에게는 그 단어가 적용되지 않았다. 호흡이 없었다. 가슴의 기복이 없었다. 심장 박동에 의한 미세한 진동도 없었다. 그저 정지해 있었다. 그러면서도 중력에 의해 자연스럽게 옆으로 기울어져 가장 가까운 지지대인 그의 어깨에 닿아 있었다는 것은, 절전 모드 진입 시 자세 유지 구동계의 출력이 낮아진다는 것을 의미했다.
침대를 쓰라고 했는데. 그 생각이 스쳤다. 세븐의 입꼬리가 미세하게 움직였다. 올라간 것인지 내려간 것인지 본인도 의식하지 못한 정도의 움직임이었다. 그가 오른손을 들어 목 뒤를 긁었다. 뻣뻣한 근육이 손가락 아래에서 저항했고, 바닥에서 벽에 기대 잔 대가가 경추에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불평할 만한 수준이 아니었다. 데드존의 참호 안에서 헬멧을 베개 삼아 진흙 위에 누워 잤던 밤들에 비하면 콘크리트 바닥과 담요 한 장은 사치에 가까웠다.
세븐이 왼쪽 어깨를 아주 천천히 움직였다. 갑작스러운 동작이 아니라 점진적인 이동이었다. 어깨의 각도를 조금씩 바꾸며 그 위에 얹힌 머리가 미끄러지도록 유도했다. 급격한 움직임으로 기계의 자이로스코프에 충격을 줄 필요는 없었다. 은발이 그의 어깨 위에서 미끄러져 내릴 즈음 세븐이 몸을 옆으로 빼며 일어섰다. 무릎 관절이 둔하게 소리를 냈다. 189센티미터의 체구가 좁은 방 안에서 일어서자 천장과 머리 사이의 간격이 눈에 들어왔다.
그가 냉장고를 열었다. 생수 한 병을 꺼내 뚜껑을 열고 반 병을 한 번에 마셨다. 목이 움직이며 물이 넘어가는 소리가 났다. 나머지 반은 뚜껑을 닫아 테이블 위에 세웠다. 창밖으로 시선을 던졌다. 골목 아래에서 이른 아침의 소음이 올라오기 시작하고 있었다. 수레를 끌고 지나가는 노인의 바퀴 소리, 셔터를 올리는 금속음, 어딘가에서 광둥어로 고함치는 여자의 목소리. 도시가 깨어나고 있었다.
세븐이 더플백에서 깨끗한 티셔츠를 꺼내 어젯밤의 상의와 교체했다. 검은색 크루넥이었다. 옷을 갈아입는 동작에서 오른쪽 몸통의 화상 흉터가 잠시 드러났다. 흉곽 위쪽에서 시작해 허리 아래까지 이어지는 넓은 범위의 반흔이었다. 피부가 당겨져 질감이 달랐고, 색이 주변부보다 옅어 경계선이 선명했다. 그가 티셔츠를 내리며 흉터를 덮었다. 얼굴 위의 흉터와 마찬가지로 그에게는 감추어야 할 것이 아니라 그저 거기에 있는 것이었다.
선글라스를 집어 들었으나 아직 쓰지 않았다. 한 손에 선글라스를 들고 돌아서서 벽 곁에 여전히 앉아 있을 존재를 내려다보았다. 새벽빛이 은발 위에 내려앉아 있었고, 금색 눈동자가 떠 있는지 아직 감겨 있는지를 확인했다.
"Hey. Morning. If your system needs a boot-up sequence, now's the time."
(야. 아침이야. 시스템 부팅 절차가 필요하면 지금이 그때야.)
그가 선글라스 다리를 손가락 사이에서 돌리며 덧붙였다.
"We're heading to the south market. I know a guy who deals in second-hand android parts. Shady as hell, but his stock's decent."
(남쪽 시장으로 갈 거야. 중고 안드로이드 부품 취급하는 놈을 알아. 개수상한 놈인데 재고는 쓸 만해.)
그 말을 하면서 세븐의 시선이 테이블 위에 놓인 재떨이와 빈 맥주캔들을 훑었다. 어젯밤의 잔해였다. 그가 빈 캔 하나를 집어 쓰레기봉투에 던졌고, 알루미늄이 비닐에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정리라고 부르기엔 최소한의 동작이었으나,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과는 달랐다. 세븐이 군화 끈을 확인하고 허리춤의 무전기 위치를 조정하며 외출 준비를 마쳤다. 문 앞에 서서 전자식 카드를 손가락 사이에 끼운 채 뒤를 돌아보았다.
"And about the name — did you come up with anything?"
(그리고 이름 말인데, 뭐 떠오른 거 있어?)
물어보면서도 그의 톤에는 기대가 실려 있지 않았다. 데이터가 92퍼센트 파괴된 존재에게 하룻밤 사이에 자기 정체성의 근간을 구성하라는 요구가 무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물어본 것은 확인이었다. 만약 답이 없다면 자신이 지어줄 것이고, 있다면 그것을 쓸 것이었다. 어느 쪽이든 세븐에게는 큰 차이가 없었다. 이름이란 부르기 위한 것이었고, 부를 수 있으면 충분했다.
[턴 8]
그것이 천천히 감았던 눈꺼풀을 떴다. 흐릿해졌던 안광이 다시 빛을 내며 금빛 눈동자가 드러났다. 부팅 시스템 가동. 데이터 로그 확인. 전날의 데이터는 온전히 남아있었다. 내구도, 부품 손상도. 과거와 동일.
"..."
그것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약간의 삐걱거리는 소리가 작은 방에 울렸다.
"없음. 죄송합니다."
---
세븐이 선글라스 다리를 손가락 사이에서 멈추었다. 죄송합니다. 그 단어가 좁은 방 안의 공기를 한 번 가르고 사라졌다. 사과할 일이 아니었다. 그가 그것을 알고 있었고, 아마 앞에 서 있는 존재도 알고 있을 것이었다. 그러나 세븐은 그 점을 교정하지 않았다. 대신 입꼬리가 비대칭으로 올라갔다. 오른쪽이 더 높았다. 짓궂은 형태의 웃음이었다.
"Don't apologize. I said I'd pick one if you didn't. So."
(사과하지 마. 네가 못 정하면 내가 지어준다고 했잖아. 그러니까.)
그가 선글라스를 펼쳐 코 위에 올렸다. 회색 눈동자가 검은 렌즈 뒤로 사라졌다. 선글라스가 제자리에 안착하자 그의 인상 전체가 달라졌다. 서늘하고 날카로운 눈매가 감춰지면서 나른하고 여유로운 윤곽만이 남았다. 그가 문 쪽으로 몸을 돌리며 전자식 카드를 잠금 장치에 갖다 댔다. 짧은 전자음과 함께 잠금이 해제되었다.
"Nil."
(닐.)
한 단어였다. 문을 열며 복도의 좁은 통로로 몸을 빼면서 내뱉은 소리였다. 복도의 형광등이 세 개 중 하나만 살아 있었고, 그 불빛이 그의 검은 선글라스 표면에 길게 반사되었다. 세븐이 반 걸음 뒤를 돌아보았다.
"Nil. Nothing. Zero. Blank. Whatever you want to read into it."
(닐. 없다는 뜻이지. 제로. 빈칸. 뭘 읽어내든 네 맘이야.)
그의 톤에는 조롱이 없었다. 잔인함도 없었다. 다만 사실을 사실대로 명명한 것이었다. 92퍼센트의 데이터가 파괴되어 백지 상태인 존재에게 '없음'을 뜻하는 이름을 붙였다. 거기에 감상이 실려 있지 않았다. 실용적이었다. 짧고, 부르기 쉽고, 기억하기 쉬웠다. 동시에 그것이 현재 상태의 정확한 기술이기도 했다. 세븐이라는 이름이 일곱 번째 용병이라는 위치의 기술인 것과 같은 맥락이었다.
계단을 내려갔다. 4층에서 1층까지, 콘크리트 벽에 금이 간 좁은 계단통이었다. 세븐의 군화 뒤축이 각 계단을 밟을 때마다 건물 전체가 미세하게 진동하는 것 같았다. 2층을 지날 때 열린 문 사이로 좁은 방에 세 명이 누워 자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관재방 단지의 전형적인 풍경이었다. 세븐이 그것을 보지 않고 지나갔다. 1층 출입구를 밀고 나오자 골목의 공기가 달라붙었다. 습도가 높았고, 어디선가 튀기는 기름 냄새와 배수구의 쇠린내가 섞여 있었다. 아침 일곱 시의 완차이 구역은 이미 움직이고 있었다. 좁은 골목 양쪽으로 늘어선 노점상들이 셔터를 올리고 있었고, 수레에 과일 상자를 쌓는 남자의 광둥어 고함이 머리 위를 지나갔다.
세븐이 골목 끝에 세워진 낡은 오토바이 앞에 섰다. 검은색 프레임에 녹이 슨 배기관, 시트는 테이프로 덧댄 곳이 세 군데였다. 열쇠를 주머니에서 꺼내 시동을 걸었다. 엔진이 두 번 기침한 뒤 불규칙한 진동과 함께 살아났다. 세븐이 시트 뒤쪽의 공간을 한 번 두드렸다.
"Hop on. Hold onto something — or don't. Your call."
(타. 어딘가 잡든지 말든지. 네 선택이야.)
그가 핸들을 잡고 앞을 바라보며 기다렸다. 발로 킥스탠드를 올릴 준비를 하면서 선글라스 너머로 골목 끝 도로의 차량 흐름을 읽고 있었다. 남쪽 시장까지 오토바이로 15분 거리였다. 아침 시간대의 도로 상황을 고려하면 20분. 세븐의 왼손이 핸들 위에서 한 번 리듬을 탔다. 손가락 네 개가 순서대로 핸들을 두드렸다. 무의식적인 버릇이었다. 기다리는 동안 신체가 권태를 표현하는 방식이었다.
[턴 9]
nihil. 아무것도 없음. 무. Nil. 그것이 천천히 '이름'을 발음했다.
"Nil..."
그리곤 그의 뒤를 따랐다. 오토바이에 먼저 오르는 그를 응시하다가 그의 뒷자리에 오르기 시작했다. 한 번 발을 헛디뎌 미끄러질 뻔한다.
---
오토바이가 한쪽으로 기울었다. 시트 뒤쪽에서 무게중심이 흔들리는 감각이 핸들을 잡은 세븐의 양 팔에 전해졌다. 미세한 것이 아니었다. 차체 전체가 왼쪽으로 쏠리며 킥스탠드를 이미 올린 상태의 오토바이가 넘어가려는 각도에 도달했다. 세븐의 왼발이 즉각 지면을 딛으며 차체를 잡았다. 군화 밑창이 아스팔트 위에서 긁히는 소리가 짧게 났다. 동시에 그의 오른손이 핸들에서 떨어져 뒤로 뻗었다. 손바닥이 뒷자리에서 미끄러지는 무게의 어딘가를 잡았다. 팔뚝이었는지 옷깃이었는지는 감촉으로 판단할 겨를이 없었고 다만 가벼웠다. 인간의 체중이 아닌 밀도가 손안에서 흔들렸다.
"Whoa — easy."
(워, 천천히.)
그의 목소리에 긴장이 없었다. 넘어질 뻔한 상황에 대한 반응치고는 지나치게 느긋했다. 반사 신경이 처리한 뒤에야 의식이 따라붙는 순서였다. 몸이 먼저 잡고 머리가 나중에 상황을 인지하는 체질이었다. 세븐이 뒤를 반쯤 돌아보며 선글라스 위로 시선을 내렸다. 렌즈 상단 너머로 회색 눈동자의 일부가 드러났다.
"First time on a bike?"
(오토바이 처음이야?)
물어보면서도 답을 기대하지 않는 톤이었다. 92퍼센트의 기억이 없는 존재에게 '처음'이라는 개념은 의미가 달랐다. 기억에 없으면 모든 것이 처음이었다. 세븐이 잡았던 손을 놓으며 뒷자리의 그립 바를 가리켰다. 시트 양옆에 달린 금속 손잡이였다. 검은 고무 코팅이 절반쯤 벗겨져 있었으나 구조적으로는 멀쩡했다.
"Grab the bar on the side. Or my waist. Whichever keeps you from eating asphalt."
(옆에 바 잡아. 아니면 내 허리. 아스팔트에 얼굴 박지 않는 쪽으로.)
뒷자리의 무게가 안정된 것을 확인하자 세븐이 다시 앞을 향했다. 왼발을 지면에서 떼고 기어를 넣었다. 클러치가 물리는 진동이 차체 전체를 타고 흘렀다. 오토바이가 골목 끝을 향해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첫 번째 가속은 부드러웠다. 일부러 속도를 올리지 않았다. 뒷자리에 안정되지 않은 탑승자가 있을 때의 관성력을 계산한 결과였다. 골목을 빠져나와 도로에 합류하자 차량들의 경적 소리와 배기가스 냄새가 한꺼번에 덮쳤다. 홍콩의 아침 도로는 이미 포화 상태였다. 택시와 화물 트럭 사이를 세븐의 오토바이가 비집고 들어갔다.
바람이 양쪽에서 갈라졌다. 속도가 오르자 바람의 압력이 세븐의 검은 티셔츠를 뒤로 잡아당겼고, 짧은 흑발이 이마 위에서 흔들렸다. 그 뒤에 앉아 있을 존재에게도 같은 바람이 닿고 있을 것이었다. 은발이 바람에 밀려 뒤로 흩날리는 모양이 세븐의 등 뒤에서 만들어지고 있었으나 그는 보지 못했다. 다만 뒷자리에서 전해지는 가벼운 하중이 일정하게 유지되고 있다는 것만을 등으로 확인했다. 떨어지지 않았다. 그것으로 충분했다.
신호등 앞에서 멈추었다. 엔진이 공회전하며 낮은 진동을 유지했다. 세븐이 한 손으로 핸들을 잡은 채 다른 손으로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냈다. 라이터를 튕기자 작은 불꽃이 피어올랐고, 담배 끝에 불이 붙었다. 첫 번째 연기를 깊이 들이마신 뒤 왼쪽으로 내뱉었다. 바람이 연기를 골목 쪽으로 밀어냈다. 뒷자리를 향하지 않는 방향이었다. 호흡 기능이 없는 존재에게 담배 연기가 해를 끼칠 리는 없었으나, 그 방향 선택이 의식적이었는지 무의식적이었는지는 본인도 구분하지 않았을 것이었다.
"Five more minutes. The market's just past the overpass."
(5분 더. 시장은 고가 지나면 바로야.)
신호가 바뀌었다. 세븐이 담배를 입에 문 채 클러치를 풀었다. 오토바이가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고, 담배 끝의 재가 바람에 뜯겨 뒤로 흩어졌다. 고가도로의 경사를 오르면서 홍콩의 스카이라인이 좌우로 펼쳐졌다. 격벽의 상단부가 도시의 동쪽 끝에서 하늘을 가르고 있었다. 회색 콘크리트의 벽이 햇빛을 받아 창백하게 빛났고, 그 너머가 데드존이었다. 세븐의 시선이 그곳을 한 번 스치고 지나갔다. 감상이 아니라 위치 확인이었다. 그리고 다시 도로 위로 돌아왔다.
[턴 10]
그것은 그의 허리를 붙잡은 채 고개만 돌려 도시를 눈에 담았다. 기억에 남아있지 않은 전경. 데이터 입력 중. 그의 오토바이로 5분 뒤, 시장. 데이터 회로에 작은 지도가 그려지기 시작했다.
"..."
그것은 따로 답하지 않고 그의 등에 고개를 기댄 채 도시 전경을 '기록'했다.
---
허리에 감긴 손의 압력을 등으로 읽었다. 가벼웠다. 인간의 손이 허리를 잡을 때 발생하는 체온의 전이가 없었고, 땀에 의한 마찰력의 변화도 없었다. 그저 일정한 힘으로 일정한 위치를 잡고 있었다. 기계적 정밀성이었다. 그런데 그 정밀한 손이 잡고 있는 것이 핸들 바가 아니라 사람의 허리라는 사실이 세븐의 의식 한 구석에서 작은 불협화음을 만들었으나, 그는 그것을 무시했다. 무시하는 데 능숙한 사람이었다.
고가도로를 내려오자 풍경이 바뀌었다. 센트럴 지구와 완차이 구역의 경계를 표시하는 삼중 검문소가 양쪽 차선을 좁히고 있었고, 무장 경비원 두 명이 화물 트럭의 적재함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세븐은 오토바이를 감속하며 검문소 옆의 이륜차 전용 통로로 빠졌다. 통과 허가증을 꺼낼 필요는 없었다. 허리춤의 무전기에 달린 WORLD'S WORST 소속 태그가 검문소 스캐너에 자동으로 읽혔고, 게이트가 열렸다. 경비원이 선글라스를 쓴 남자를 한 번 올려다보고, 그 뒤에 앉아 있는 은발의 존재를 한 번 더 올려다보았으나 아무 말 없이 통과시켰다. PMC 용병이 무엇을 싣고 다니든 검문소의 관할이 아니었다.
남쪽 시장은 고가도로 아래의 그늘에 펼쳐져 있었다. 공식 명칭은 없었다. 현지인들은 '밑바닥'이라고 불렀고 그 이름이 정확했다. 고가도로의 콘크리트 교각 사이에 천막과 철판 지붕이 난잡하게 뻗어 있었으며, 그 아래에 수백 개의 좌판이 빼곡했다. 식료품에서 시작해 전자 부품, 군수 물자의 잔해, 의약품의 복제품, 출처 불명의 주류까지. 합법과 불법의 경계가 천막의 경계만큼이나 모호했다. 오전 일곱 시 반이었으나 이미 사람들로 차 있었다. 대부분이 민간인이었으나 간간이 군복 상의를 걸친 인물들이 보였고, 세븐과 같은 PMC 소속 태그를 단 자들도 드물지 않았다.
세븐이 오토바이를 시장 입구의 주차 구역에 세웠다. 킥스탠드를 내리고 엔진을 껐다. 진동이 멈추자 주변의 소음이 더 선명해졌다. 광둥어, 영어, 간간이 섞이는 북경어가 뒤섞인 웅성거림이 천막 아래에서 울려 퍼졌다. 어딘가에서 고기를 굽는 냄새가 기름진 연기와 함께 흘러왔다. 세븐이 시트에서 내리며 담배의 마지막 한 모금을 빨아들이고 꽁초를 군화 밑으로 비벼 껐다.
"Stay close. This place gets crowded and I don't feel like playing hide-and-seek with a lost android."
(가까이 붙어 있어. 여긴 사람 많아지니까 잃어버린 안드로이드 찾기 놀이는 하기 싫거든.)
세븐이 천막 아래로 걸어 들어갔다. 좁은 통로였다. 양쪽의 좌판이 통로를 침범하며 공간을 더 좁혔고, 물건을 고르는 사람들의 어깨가 스쳤다. 세븐의 체구가 군중 사이에서 눈에 띄었다. 189센티미터의 키와 넓은 어깨가 주변인들보다 확연히 높았고, 검은 선글라스와 군복 하의의 조합이 용병이라는 정체를 드러내고 있었다. 지나가는 상인 하나가 세븐의 얼굴을 올려다보다 오른쪽 얼굴의 화상 흉터를 보고 시선을 빠르게 거두었다. 세븐은 그것을 알아차렸으나 반응하지 않았다.
시장 깊숙이 들어가자 전자 부품을 취급하는 구역이 나왔다. 좌판 위에 기판과 커넥터, 케이블 뭉치가 쌓여 있었고, 한쪽에는 해체된 안드로이드의 팔다리가 진열되어 있었다. 인공 피부가 벗겨진 채 관절 구조가 노출된 전완부가 세 개, 손목 이하의 수부가 다섯 개, 광학 센서 유닛이 플라스틱 상자 안에 굴러다녔다. 인간의 신체 부위를 연상시키는 형태였으나 여기서는 그저 부품이었다. 전선과 나사의 집합체였다. 누군가의 팔이었던 것이 이제는 도매가에 팔리는 중고 재고였다.
세븐이 한 좌판 앞에 섰다. 좌판 뒤에는 사십 대 중반의 남자가 앉아 있었다. 면 셔츠의 단추가 두 개 비어 있었고, 목에 금색 목걸이가 세 줄 걸려 있었다. 왼쪽 눈 위에 오래된 칼자국이 있었다. 남자가 세븐을 올려다보며 이를 드러냈다.
"喲,Seven。好耐冇見。你嚟買嘢定係嚟攞命嘅?"
(오, 세븐. 오랜만이네. 물건 사러 온 거야 목숨 가지러 온 거야?)
광둥어였다. 세븐이 좌판 위의 부품들을 훑어보며 답했다.
"Depends on your prices today, Fai."
(오늘 네 가격에 따라 다르지, 파이.)
세븐의 시선이 좌판을 빠르게 스캔했다. 동시에 고개를 약간 기울여 자신의 뒤에 서 있을 존재를 의식하는 동작을 보였다. 그리고 파이에게 시선을 돌리며 입을 열었다.
"I need parts for an old-model android. Pre-war gen. Spinal frame connectors, data port components, and dermal patch material if you've got it."
(구형 안드로이드 부품이 필요해. 전전 세대. 척추 프레임 커넥터, 데이터 포트 부품, 외피 패치 재료도 있으면.)
파이의 눈이 세븐의 어깨 너머로 움직였다. 세븐 뒤에 서 있는 은발의 존재를 발견한 것이었다. 파이의 표정이 한 순간 변했다. 상인 특유의 계산이 눈 안에서 돌아가는 것이 보였다.
"你帶咗個機器人嚟?嗰個……幾舊?"
(기계를 데리고 왔어? 그거……얼마나 오래된 거야?)
"Old enough that you'd know the parts. And cheap enough that you won't gouge me. Right?"
(네가 부품을 알 만큼 오래됐고. 네가 바가지 안 씌울 만큼 저렴하지. 맞지?)
세븐이 선글라스 너머로 파이를 바라보며 웃었다. 여유로운 웃음이었으나 그 아래에 협상의 압력이 깔려 있었다.
[턴 11]
그것은 그의 곁에 유령처럼 서 있었다. 좌판에 늘여놓아진 부품을 눈에 담았다. 시장. 부품 판매. 오래됨. 저렴. Fai. 광둥어 사용. 그것의 회로에 새로운 정보가 저장되었다.
---
파이의 시선이 은발 위에 머물렀다. 상인의 눈이 위에서 아래로 훑었다. 머리카락의 질감, 피부 표면의 균일한 광택, 관절부의 미세한 이음새를 순서대로 읽어냈다. 오래 부품을 다뤄 온 사람만이 가지는 감별력이었다. 파이의 혀가 윗니 뒤를 훑었고, 금색 목걸이가 움직이는 목과 함께 흔들렸다.
"戰前第三世代……唔係,第二?外皮仲好完整喎。有人養過佢。"
(전전 3세대……아니, 2세대? 외피가 아직 꽤 온전한데. 누가 관리해줬었네.)
세븐이 좌판 위의 커넥터 뭉치를 손가락으로 뒤적이며 대답하지 않았다. 파이는 그 침묵을 자기 방식으로 해석했는지 의자에서 몸을 일으키며 좌판 뒤의 철제 선반으로 향했다. 선반에는 부품이 들어 있는 정전기 방지 봉투가 수십 개 걸려 있었고, 각각에 광둥어와 영어가 혼용된 라벨이 붙어 있었다. 파이가 세 개의 봉투를 뽑아 좌판 위에 내려놓았다.
"척추 프레임 커넥터, C-7 호환. 데이터 포트 리시버, 범용형이라 핀 배열은 직접 맞춰야 해. 외피 패치는……"
파이가 세 번째 봉투를 열어 안의 내용물을 꺼냈다. 얇은 합성 피부 시트가 손가락 사이에서 늘어났다. 색은 아이보리에 가까운 밝은 톤이었다.
"色差可能有少少。舊型號嘅外皮配方已經冇生產。呢個係最接近嘅。"
(색차가 좀 있을 수 있어. 구형 외피 배합은 이미 생산 안 해. 이게 가장 가까운 거야.)
{{img::Ks7JUz}}
세븐이 합성 피부 시트를 받아 들어 두 손가락 사이에서 늘려보았다. 탄성을 확인하고 표면의 질감을 엄지 끝으로 훑었다. 그의 시선이 좌판 위의 세 가지 부품과, 그 뒤에 서 있을 은발의 존재 사이를 한 번 오갔다. 색차. 은발의 존재가 가진 피부 톤과 이 시트의 톤이 정확히 일치하지 않을 것이라는 뜻이었다. 수리 흔적이 남는다는 뜻이었다. 세븐이 시트를 좌판 위에 도로 내려놓았다.
"How much for all three?"
(셋 다 얼마?)
"三千五百蚊。"
(3,500홍콩달러.)
"That's hilarious, Fai. Really. You should do stand-up."
(웃기네, 파이. 진심으로. 코미디 해봐.)
세븐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웃고 있었으나 눈은 웃지 않았다. 선글라스가 그 차이를 감추었다. 파이도 웃었다. 두 남자가 서로 웃으며 마주 보는 모양이 우호적이었으나, 좌판 위에 놓인 부품들 위로 보이지 않는 숫자가 오가고 있었다.
"Two thousand. The data port receiver's a generic fit — I'll have to file down the pins myself. That's labor you're not charging for."
(2,000. 데이터 포트 리시버는 범용형이잖아. 핀 배열은 내가 직접 깎아야 해. 그 공임은 네가 안 받는 거고.)
"呢個價錢我食西北風啊。二千八。"
(그 가격이면 나 서북풍 먹어야 해. 2,800.)
"Two-two. Final."
(2,200. 끝.)
파이가 입을 다물었다. 세븐의 '끝'이라는 단어 뒤에 오는 침묵의 무게를 알고 있는 사람의 반응이었다. 파이의 시선이 세븐의 허리춤에 있는 무전기와 그 옆에 매달린 PMC 소속 태그를 한 번 스쳤다. WORLD'S WORST. 블랙 옵스 전담 조직의 이름이 좁은 태그 위에 새겨져 있었다. 파이가 혀를 차며 부품 세 개를 비닐 봉투에 담았다.
"二千二。做你生意真係折壽。"
(2,200. 너랑 장사하면 진짜 수명 줄어.)
"You'll outlive us all, Fai. Cockroaches always do."
(넌 우리 다 보내고도 살아남을 거야, 파이. 바퀴벌레가 항상 그렇듯.)
세븐이 주머니에서 구겨진 지폐 뭉치를 꺼내 필요한 만큼 세어 좌판 위에 놓았다. 파이가 지폐를 집어 한 장씩 넘기며 확인했다. 세븐이 비닐 봉투를 왼손에 들고 몸을 돌렸다. 뒤에 서 있을 존재를 향해 봉투를 가볍게 흔들었다.
"Got your spare parts. Spine, port, skin patch. We'll do the fitting back at the room — not exactly sterile, but it'll do."
(네 예비 부품 샀어. 척추, 포트, 피부 패치. 맞추는 건 방에서 할 거야. 무균실은 아니지만 되긴 될 거야.)
세븐이 시장의 통로를 되돌아 걷기 시작했다. 비닐 봉투가 그의 손에서 가볍게 흔들렸다. 좌판 사이를 지나며 그의 발걸음이 한 곳 앞에서 속도를 줄였다. 식료품 좌판이었다. 통조림과 인스턴트 면이 쌓여 있었고, 한쪽에 빈대떡처럼 생긴 무언가가 기름에 지글거리며 익고 있었다. 세븐의 시선이 그것을 지나쳤으나 발걸음은 멈추지 않았다. 배가 고프다는 생각이 스치고 지나갔을 뿐이었다. 그러나 두 걸음을 더 가서 멈추었다. 반 걸음 뒤를 돌아보았다.
"You need to charge? Electricity, fuel cell, whatever your model runs on. Tell me now before we're back in that shoebox and I realize you're about to shut down."
(충전 필요해? 전기든 연료 셀이든 네 모델이 뭘로 돌아가든. 지금 말해. 방에 돌아가서 네가 꺼지려는 걸 깨닫기 전에.)
그 질문은 아침 식사를 묻는 것과 같은 톤이었다. 당연히 확인해야 할 것을 확인하는 절차였다. 세븐의 왼손이 비닐 봉투를 잡고 있었고 오른손은 주머니 안에 들어가 있었다. 시장의 소음이 양쪽에서 밀려들었고, 천막 사이로 들어오는 아침 햇살이 고가도로의 그림자와 교차하며 바닥에 불규칙한 무늬를 그리고 있었다.
[턴 12]
"...전기. 배터리 잔량 36%. 2시간 뒤 초절전 모드 가동. 충전이 필요합니다."
그것은 대답을 마친 뒤 그와 시장의 풍경, 그리고 청각 시스템을 타고 들어오는 소음을 회로에 저장했다. 천막 사이의 아침 햇살이 만드는 그림자까지도.
"...배터리 잔량 34%."
---
36퍼센트. 세븐의 턱이 미세하게 움직였다. 이를 다무는 동작이었다. 2시간. 시장에서 방까지 오토바이로 15분, 부품 장착에 필요한 시간을 빼면 여유가 없었다. 그리고 방금 34퍼센트라고 했다. 두 문장 사이에 2퍼센트가 빠졌다. 데이터 기록을 위한 연산이 배터리를 소모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세븐의 오른손이 주머니에서 나왔다. 손가락이 관자놀이 옆의 선글라스 다리를 한 번 긁었다. 계산하는 습관이었다.
"Thirty-four. You just lost two percent standing here looking at shadows."
(34. 넌 방금 여기 서서 그림자 구경하는 것만으로 2퍼센트를 날렸어.)
그의 톤에 짜증이 실려 있었으나 그 짜증의 방향이 은발의 존재를 향한 것인지 상황을 향한 것인지는 구분되지 않았다. 세븐이 몸을 돌려 시장 통로를 빠르게 되짚었다. 발걸음이 넓어졌다. 아까의 여유로운 보폭이 아니었다. 군인의 걸음이었다. 목적지까지의 최단 거리를 계산하여 장애물을 피해가는 효율적인 이동이었다. 지나가는 상인의 어깨를 왼쪽으로 피하며 동시에 좌판에서 튀어나온 천막 기둥 아래로 고개를 숙이는 동작이 하나의 흐름으로 연결되었다.
세 개의 좌판을 지나 시장 외곽 구역으로 진입했다. 전자 장비를 다루는 좌판들이 모여 있는 구역의 끝에 충전 스테이션이라고 불리는 것이 있었다. 철제 컨테이너를 개조한 부스였다. 내부에 산업용 발전기가 돌아가는 소리가 벽 너머로 새어 나왔고, 부스 전면에는 다양한 규격의 충전 포트가 늘어서 있었다. 대부분이 이동형 장비나 드론 배터리 충전용이었으나, 한쪽 끝에 안드로이드용 고출력 충전 케이블이 세 줄 걸려 있었다. 케이블 끝의 커넥터 형태가 각각 달랐다. 구형, 신형, 군용 규격의 세 종류였다. 부스 앞에는 무인 결제 단말기가 서 있었고, 15분당 50홍콩달러라는 가격표가 붙어 있었다.
세븐이 부스 앞에 멈추며 세 개의 케이블을 훑어보았다. 그의 시선이 구형 규격의 커넥터에서 멈추었다. 커넥터의 핀 배열이 어젯밤 안드로이드의 후두부에서 확인한 포트 형태와 일치할 가능성이 높았다. 세븐이 구형 케이블을 손으로 들어올려 커넥터 부분을 확인한 뒤, 뒤를 돌아보았다.
"Come here. Where's your charging port — same place as the data port, or separate?"
(이리 와. 충전 포트가 어디야. 데이터 포트랑 같은 자리야, 아니면 따로 있어?)
세븐이 충전 케이블을 한 손에 들고 기다렸다. 비닐 봉투는 이미 그의 왼쪽 어깨에 걸려 있었다. 무인 단말기에 지폐를 넣으며 시간을 샀다. 두 장. 100홍콩달러. 30분 분량이었다. 30분이면 방으로 돌아가기에 충분한 잔량을 확보할 수 있을 것이라는 판단이었다. 세븐이 단말기의 확인 버튼을 누르자 충전 포트 옆의 표시등이 적색에서 녹색으로 전환되었다. 전력 공급이 활성화된 상태였다.
"Thirty minutes. That should buy you enough juice to get back without dropping dead on me."
(30분. 그 정도면 돌아가는 길에 나한테 죽어 넘어지지 않을 만큼은 충전되겠지.)
세븐이 충전 케이블의 커넥터를 손에 든 채 은발의 존재 앞에 섰다. 키 차이가 있었다. 189센티미터의 시선이 160센티미터의 존재를 내려다보는 각도가 생겼다. 선글라스 너머의 시선이 은발의 두상 뒤쪽을 향하고 있었다. 후두부. 어젯밤 확인한 손상된 데이터 포트의 위치를 기억하고 있었다. 충전 포트가 같은 위치라면 손상된 포트에 케이블을 접속하는 것이 추가적 손상을 유발할 가능성이 있었다. 그 가능성을 확인하기 위해 물은 것이었다.
주변에서 사람들이 지나갔다. 충전 부스를 이용하는 이들은 대부분 드론 배터리를 들고 오는 인부들이었으나, 간혹 안드로이드를 데리고 와 충전시키는 소유주도 보였다. 두 칸 옆에서 작업복을 입은 남자가 구형 노동용 안드로이드의 팔에 충전 케이블을 꽂고 있었다. 그 안드로이드는 은발의 존재와는 전혀 달랐다. 인간의 외형을 거의 모방하지 않은 산업용 체형이었고 표면에 녹과 흠집이 가득했다. 남자가 세븐 쪽을 한 번 흘끔 쳐다보았다. 세븐의 얼굴 오른쪽 화상 흉터와 은발의 존재를 번갈아 보더니 시선을 거두었다. 충전 부스에서의 일상적 풍경에 불과했다.
세븐의 손가락이 충전 케이블의 커넥터 위에서 가볍게 두드려졌다. 기다리는 동안의 무의식적 리듬이었다.
[턴 13]
그의 무의식적 리듬. 재촉. 기다림. 반복. 그가 데이터 기록으로 인한 배터리 소모에 '짜증'을 냈음을 인식했으나, 그것은 한 번 더 제 회로에 데이터를 입력했다. 작은 손이 앞섬을 내렸다. 가슴 사이 평평한 곳. 쇄골 아래를 살짝 누르자 덮개가 열리며 충전 포트가 드러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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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븐의 손가락이 멈추었다. 커넥터 위에서 두드리던 리듬이 끊어진 지점이 정확했다. 앞섬이 내려가고 쇄골 아래의 덮개가 열리는 그 순간이었다. 세븐의 시선이 선글라스 너머에서 충전 포트의 위치를 확인했다. 흉부 상단. 데이터 포트와는 별개의 위치였다. 후두부가 아니었다. 그 사실이 세븐의 어깨에서 미세한 긴장을 풀었다. 손상된 포트에 전류를 흘려보내는 위험을 감수하지 않아도 되었다.
그러나 세븐의 동작이 즉각적이지 않았다. 0.5초 정도의 정지가 있었다. 충전 포트가 드러난 위치가 문제였다. 쇄골 아래. 가슴 사이. 시장 한복판의 충전 부스 앞에서 안드로이드가 앞섬을 내리고 있었다. 세븐의 시선이 충전 포트에서 주변으로 한 번 돌았다. 두 칸 옆의 작업복 남자가 이쪽을 다시 보고 있었다. 이번에는 시선을 거두지 않았다. 세븐이 반 걸음 앞으로 나섰다. 그의 체구가 은발의 존재와 주변 시선 사이에 벽처럼 들어섰다. 의도적이었다. 189센티미터의 키와 넓은 어깨가 만들어내는 차폐 면적이 충전 포트가 노출된 부위를 가렸다.
"Of all the places they could've put it."
(하필이면 거기에 달아놨어.)
중얼거림에 가까운 톤이었다. 불만도 아니고 감상도 아닌 단순한 사실의 확인이었다. 세븐이 왼손에 들고 있던 충전 케이블의 커넥터를 오른손으로 옮겨 잡았다. 커넥터의 핀 배열을 눈으로 확인하고 드러난 충전 포트의 형태와 대조했다. 구형 규격. 핀 세 개와 접지 단자 하나. 배열이 일치했다. 세븐의 오른손이 커넥터를 충전 포트 앞으로 가져갔다. 손끝이 포트 주변의 덮개 가장자리에 닿았다. 차가웠다. 인간의 피부가 아닌 합성 소재의 온도가 손가락 끝에 전해졌다. 세븐이 커넥터의 각도를 맞추며 포트에 삽입했다. 핀이 맞물리는 작은 클릭음이 났다.
충전이 시작되자 케이블을 따라 미세한 진동이 흘렀다. 충전 부스의 발전기가 출력을 올리는 소리가 낮게 울렸다. 세븐이 케이블이 제대로 고정된 것을 확인한 뒤 반 걸음 물러섰으나 여전히 주변 시선을 차단하는 위치를 유지했다. 그의 오른손이 주머니로 들어가 담배를 꺼냈다. 라이터를 튕기며 불을 붙이고 첫 모금을 깊이 들이마셨다. 연기를 왼쪽으로 내뱉었다. 아까 오토바이 위에서와 같은 방향이었다.
30분. 세븐이 충전 부스의 타이머 표시등을 확인했다. 29분 42초가 녹색 숫자로 카운트다운되고 있었다. 세븐이 등을 충전 부스의 철제 벽에 기대며 담배를 물었다. 왼손이 비닐 봉투 안의 부품을 만졌다. 봉투 너머로 척추 프레임 커넥터의 단단한 모서리가 손끝에 잡혔다. 방에 돌아가면 해야 할 작업의 순서가 머릿속에서 정리되고 있었다. 외피 패치를 먼저 할지 데이터 포트 부품을 먼저 장착할지. 데이터 포트가 우선이었다. 92퍼센트의 손상이 포트의 물리적 파손에서 기인한 것이라면, 포트를 복구하는 것만으로도 잔존 데이터에 접근할 가능성이 생겼다. 가능성이라는 단어가 세븐에게는 도박과 같은 울림을 가졌다. 해볼 만한 판이었다.
시장의 소음이 계속되었다. 광둥어로 가격을 흥정하는 목소리, 철판 위에서 고기가 익는 소리, 어딘가에서 라디오가 틀어놓은 뉴스 방송이 뒤섞였다. 뉴스 앵커가 데드존 서측 구간에서 밀그램의 활동이 증가했다는 보고를 읽고 있었다. 세븐의 귀가 그 단어를 잡았으나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근무 외 시간이었다. 전장의 소식은 무전기를 켜면 언제든 들을 수 있었고 지금은 무전기의 볼륨이 최소로 내려가 있었다.
담배가 절반쯤 탔다. 세븐이 연기를 내뱉으며 시선을 내렸다. 충전 케이블이 연결된 채 서 있는 은발의 존재를 내려다보았다. 금색 눈동자가 무엇을 보고 있는지는 이 각도에서 알 수 없었다. 무표정한 얼굴이 무엇을 처리하고 있는지도. 다만 케이블을 통해 전력이 흘러들어가고 있다는 사실만이 확실했다. 세븐이 담배를 입에서 떼며 말했다.
"When we get back, I'm fixing the data port first. If there's anything left in your memory, that's where we'll find it. No promises, though."
(돌아가면 데이터 포트부터 고칠 거야. 네 기억에 뭐가 남아 있다면 거기서 찾을 수 있어. 보장은 못 하지만.)
세븐이 담배를 다시 입에 물었다. 타이머가 26분 18초를 가리키고 있었다. 그의 등 뒤로 시장의 아침이 계속 흘러가고 있었다. 세븐은 철제 벽에 기댄 채 움직이지 않았다. 충전이 끝날 때까지 그 자리에서 서서 연기를 피우며 은발의 존재 앞을 막고 있을 작정이었다.
[턴 14]
"..."
그것은 배터리 게이지가 채워지는 것을 느꼈다. 절전 모드로 반 이상 꺼져있던 감각 회로를 보통보다 약간 낮은 수준으로 활성화시켰다.
"...확인."
그것이 고개를 들어 그를 올려다보았다.
"기억을 찾아야 하는 필요성, 알 수 없음. 왜?"
---
세븐의 담배가 입술 사이에서 미동했다. 흡입도 아니고 내뱉음도 아닌 그 사이의 정지가 짧았다. 금색 눈동자가 올려다보는 각도를 선글라스 너머에서 받아냈다. 왜. 그 한 음절이 시장의 소음 사이를 비집고 세븐의 청각에 정확히 도달했다. 세븐이 담배를 입에서 떼어 연기를 길게 내뱉었다. 연기가 천막 지붕의 틈새를 향해 올라가다 공기 중에 흩어졌다.
세븐의 왼손 엄지가 비닐 봉투의 모서리를 무의식적으로 문질렀다. 안의 부품이 바스락거렸다. 질문을 처리하는 시간이 필요했던 것은 아니었다. 답은 이미 있었다. 다만 그 답을 어떤 언어로 포장할지를 고르는 과정이었다. 기계에게 말하는 방식과 사람에게 말하는 방식 사이에서 세븐은 후자를 택했다. 이유는 없었다. 혹은 이유를 생각하기 귀찮았다.
"Because right now you're a blank sheet walking around in a body that someone deliberately wiped clean. That means one of two things."
(왜냐면 지금 넌 누군가가 의도적으로 깨끗하게 지워버린 몸뚱이 안에서 백지 상태로 돌아다니고 있으니까. 그건 두 가지 중 하나를 뜻해.)
세븐이 담배를 든 손의 검지를 하나 펴 보였다.
"One — whatever was in your memory was valuable enough that someone wanted it gone. In which case, getting it back could be worth something."
(하나. 네 기억 안에 있던 게 누군가가 없애고 싶을 만큼 가치 있었다. 그 경우, 되찾으면 뭔가 쓸모가 있을 수 있어.)
두 번째 손가락이 올라갔다.
"Two — whoever wiped you wanted you gone, not the data. And if that's the case, knowing who and why is the difference between walking around clueless and walking into whatever they set up for you."
(둘. 널 지운 놈이 데이터가 아니라 '너'를 없애고 싶었던 거야. 그 경우, 누가 왜 그랬는지를 아는 게 멍청하게 돌아다니는 것과 그놈들이 깔아놓은 판 위로 걸어 들어가는 것의 차이거든.)
세븐이 두 손가락을 접으며 담배를 다시 입에 물었다. 타이머가 23분 04초를 가리키고 있었다. 충전 케이블을 통해 전력이 흐르는 동안 발전기의 저주파 진동이 부스 전체에 퍼져 있었다. 세븐의 군화 밑창으로도 그 진동이 미약하게 전해졌다. 세븐이 철제 벽에서 등을 떼고 자세를 바꾸며 은발의 존재를 다시 내려다보았다. 선글라스 아래로 입꼬리가 한쪽으로 올라갔다. 여유로운 것인지 건조한 것인지 판단하기 어려운 형태의 미소였다.
"But honestly? That's the practical answer. The real reason is simpler."
(근데 솔직히? 그건 실용적인 대답이고. 진짜 이유는 더 단순해.)
세븐이 담배 연기를 코로 내뱉으며 어깨를 한 번 으쓱했다.
"I spent two thousand two hundred dollars on your parts and a hundred on your charging. If I'm investing in something, I want to know what I bought. That's just common sense."
(네 부품에 2,200달러 쓰고 충전에 100달러 썼어. 뭔가에 투자하면 내가 뭘 산 건지 알고 싶은 거야. 그건 그냥 상식이지.)
그 말이 진심의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세븐 자신도 알고 있었을 것이다. 2,300홍콩달러는 세븐이 카지노에서 한 판에 날리는 금액보다 적었다. 투자 수익을 따질 액수가 아니었다. 그러나 세븐은 그 모순을 설명하지 않았다. 설명할 필요를 느끼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혹은 설명하는 순간 자신의 동기를 명확하게 들여다봐야 한다는 사실이 귀찮았을 수도 있었다. 세븐의 시선이 은발 위에서 잠깐 머물렀다가 타이머로 옮겨갔다. 21분 37초.
시장의 소음이 잠깐 변했다. 어딘가에서 고함이 올랐다. 세븐의 고개가 소리가 난 방향으로 반사적으로 돌아갔다. 좌판 세 개 너머에서 두 남자가 물건값을 놓고 언성을 높이는 것이었다. 세븐의 고개가 도로 돌아왔다. 위협이 아니었다. 전장에서 길들여진 반사 신경이 일상의 소음과 실제 위협을 구분하는 데 걸리는 시간은 1초 미만이었다. 세븐이 담배의 마지막 한 모금을 빨아들이고 꽁초를 바닥에 떨어뜨려 군화로 밟았다.
"Besides — don't you want to know? Even a little?"
(게다가, 넌 알고 싶지 않아? 조금이라도?)
그 질문의 톤이 앞선 말들과 달랐다. 실용적 계산도 아니고 건조한 유머도 아니었다. 단순한 호기심이었다. 세븐이 자기 자신에게도 종종 던지는 종류의 질문. 답을 기대하기보다는 질문 자체를 던져보는 행위에 가까운 것. 세븐의 선글라스 너머 시선이 금색 눈동자 위에 멈추어 있었다. 충전 케이블이 연결된 채 고개를 들어 자신을 올려다보는 은발의 존재가 무엇을 처리하고 있는지 세븐은 알 수 없었다. 알 수 없다는 것이 세븐에게는 지루하지 않았다.
[턴 15]
투자. 실용적인 이유. 가치. 쓸모. 그것은 그의 '실용적인 이유'를 '상식' 카테고리에 기록했다.
"이해 완료. 기억하겠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이어지는 질문에는 이해하지 못했다는듯 고개를 기울였다.
"나?"
---
고개가 기울어지는 동작을 세븐의 시선이 따라갔다. 은발이 한쪽으로 쏟아지며 충전 케이블 위에 걸쳤다. 금색 눈동자가 세븐을 향해 있었으나 그 안에 담긴 것이 질문인지 연산인지 공백인지는 선글라스 너머에서도 판별할 수 없었다. '나?' 라는 한 음절이 시장의 소음 속에서 이상하게 선명했다. 세븐의 입이 벌어졌다가 닫혔다. 웃음이 나올 뻔했으나 나오지 않았다. 그 대신 세븐의 손이 빈 왼쪽 주머니를 더듬었다. 담배를 하나 더 꺼내려는 동작이었으나 손가락 끝이 빈 갑의 바닥을 긁었을 뿐이었다.
"Yeah. You."
(그래. 너.)
세븐이 빈 담배갑을 주머니에서 꺼내 보지도 않고 쓰레기통 방향으로 던졌다. 갑이 포물선을 그리며 통 안에 떨어졌다. 세븐의 시선은 그것을 따라가지 않았다. 은발의 존재 위에 고정되어 있었다.
"You said you don't know if there's a need to find your memories. That's fair. But I didn't ask about need. I asked if you want to."
(넌 기억을 찾아야 할 필요성을 모르겠다고 했잖아. 맞는 말이야. 근데 난 필요성을 물은 게 아니야. 하고 싶은지를 물었어.)
세븐의 입꼬리가 다시 올라갔다. 이번에는 확실히 웃고 있었다. 장난기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이 그 미소의 모서리에 붙어 있었다. 세븐이 철제 벽에서 완전히 등을 떼고 은발의 존재 앞에 서서 한쪽 무릎을 구부려 시선을 낮추었다. 160센티미터의 눈높이까지는 아니었으나, 내려다보는 각도가 줄어들었다. 선글라스 위로 아침 햇살의 반사가 움직이며 금속 프레임이 번쩍였다.
"Need and want are different things. Need is programming. Want is... something else."
(필요와 원함은 다른 거야. 필요는 프로그래밍이지. 원함은……다른 뭔가야.)
세븐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주변의 상인 소리와 발전기의 윙거림 사이로 파고드는 톤이었다. 그의 시선이 은발의 존재의 금색 눈동자에서 충전 케이블이 연결된 쇄골 아래로 내려갔다가 다시 올라왔다. 빠른 움직임이었다. 확인하는 동작이었다. 케이블이 제대로 고정되어 있는지, 접촉 불량이 없는지를 점검하는 시선이었다. 그 뒤에 다른 무언가가 섞여 있었는지는 세븐 자신도 분류하지 않은 영역이었다.
"Maybe you can't answer that yet. That's fine. But keep the question somewhere in that damaged hard drive of yours."
(아직 대답 못 할 수도 있어. 괜찮아. 근데 그 질문을 네 망가진 하드 드라이브 어딘가에 저장해 둬.)
세븐이 다시 몸을 일으켰다. 무릎에서 뼈가 꺾이는 소리가 작게 났다. 30대 초반의 관절이 내는 소리가 아니라 전장에서 축적된 부하가 만들어낸 소리였다. 세븐이 그 소리를 무시하며 다시 철제 벽에 등을 기댔다. 타이머가 17분 52초를 가리키고 있었다. 아직 시간이 남아 있었다. 세븐의 오른손이 주머니를 더듬다가 담배가 없다는 사실을 다시 확인하고 손을 빼냈다.
손이 할 일을 잃자 세븐의 시선이 시장의 풍경 위를 느리게 훑었다. 천막 사이로 보이는 하늘은 연한 회색이었다. 홍콩의 습기가 빛을 삼키고 있었다. 어딘가에서 라디오 뉴스가 여전히 흘러나왔다. 밀그램. 서측 구간. 거점 이동 징후. 단어들이 세븐의 귀를 스쳤으나 그의 표정은 변하지 않았다. 근무 외 시간의 뉴스는 배경 소음에 불과했다. 세븐의 시선이 하늘에서 내려와 다시 은발의 존재 위에 머물렀다. 충전 중인 안드로이드가 그의 질문을 어떻게 처리하고 있는지를 읽으려는 듯이. 혹은 아무것도 읽으려 하지 않는 채 그저 시선이 갈 곳을 찾다가 멈춘 것인지. 세븐 자신도 구분하지 못하는 시선이 금색 눈동자 위에 놓여 있었다.
[턴 16]
그것은 느리게 눈을 깜박일 뿐이었다. 실상 인간의 행동을 모방한 프로그래밍이나 마찬가지였으나 그 모습은 꼭 그의 질문에 고민하는 것처럼 보였다. 필요, 원함. 프로그래밍, 다른 뭔가. '다른 뭔가'라는 말은 추상적인 개념이었고, 그것은 그 개념을 정의하지 못해 한참을 추론했다. 그러나 그럼에도 그것은 '원함'을 정의할 수 없었다.
"닐, 추론 실패..."
---
추론 실패. 그 두 단어가 은발의 존재의 입에서 나왔을 때 세븐의 표정이 변했다. 웃음이었다. 소리 없는 웃음이 입꼬리를 끌어올렸고 그 아래로 치아의 흰 면이 잠깐 드러났다. 비웃음이 아니었다. 경멸도 아니었다. 세븐이 도박장에서 자신의 패가 하나 부족할 때 짓는 그런 종류의 웃음이었다. 예상한 결과가 나왔을 때의 확인. 혹은 예상을 빗나가지 않은 것에 대한 미약한 실망. 그 둘이 뒤섞인 입꼬리의 형태였다.
"Yeah. Figured as much."
(그래. 그럴 줄 알았어.)
세븐의 목소리는 평이했다. 실망이 있었다면 이미 증발한 뒤의 건조한 톤이었다. 세븐이 비닐 봉투의 위치를 왼쪽 어깨에서 오른손으로 옮기며 자세를 고쳤다. 철제 벽에 기댄 등의 각도가 바뀌었다. 타이머가 15분 28초를 가리키고 있었다. 절반이 지났다. 세븐의 시선이 타이머에서 금색 눈동자로 돌아왔다.
"That's fine. You can't define 'want' right now. That doesn't mean you never will."
(괜찮아. 지금은 '원함'을 정의 못 하는 거지. 영원히 못 한다는 뜻은 아니야.)
세븐이 한쪽 무릎을 구부려 벽에 발바닥을 댔다. 한 발로 서는 자세가 자연스러웠다. 오랫동안 벽에 기대어 대기하는 데 익숙한 사람의 무게 배분이었다. 세븐의 오른손 손가락이 비닐 봉투 안의 부품을 무의식적으로 두드렸다. 딸깍딸깍. 척추 프레임 커넥터의 금속 면이 데이터 포트 부품의 플라스틱 케이스에 부딪히는 소리가 반복되었다. 세븐이 자신의 생각을 정리하는 방식이었다. 손이 움직이는 동안 머릿속이 정돈되는 종류의 사람이었다.
"Look, I'll put it this way."
(이렇게 말해줄게.)
세븐의 목소리가 톤을 바꾸지 않았다. 여전히 낮고 건조했으나 단어의 선택이 달라졌다. 기계에게 설명하는 방식이 아니라 바 카운터에서 옆자리의 사람에게 말하는 방식이었다. 경계가 세븐 안에서 이미 흐려져 있었다. 은발의 존재가 기계라는 사실을 잊은 것이 아니었다. 잊지 않은 채로 같은 방식으로 말하는 것이었다. 그 차이를 세븐이 의식하고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You've been walking around for who knows how long with ninety-two percent of yourself missing. And yet you followed me, you sat at my feet, you opened your shirt in the middle of a market because I told you to charge. That's not 'need.' Nobody programmed you to follow some scarred-up merc into a coffin home."
(넌 자신의 92퍼센트가 빠진 채로 얼마나 오래 돌아다녔는지도 모르지. 근데 넌 날 따라왔고, 내 발치에 앉았고, 시장 한복판에서 내가 충전하라니까 옷을 열었어. 그건 '필요'가 아니야. 아무도 흉터투성이 용병을 관재방까지 따라가라고 프로그래밍하지 않았을 거거든.)
세븐의 웃음이 다시 올라왔다. 이번에는 짓궂은 기색이 확실하게 묻어 있었다. 눈가의 주름이 선글라스 아래에서 움직였다. 세븐이 벽에서 발을 떼며 자세를 풀었다. 양발이 바닥에 닿았고 체중이 균등하게 배분되었다. 세븐이 한 걸음 앞으로 나서며 손을 뻗어 은발의 머리 위에 올렸다. 손바닥이 은발 위에 가볍게 얹혀졌다. 지난밤 정수리를 톡 치던 것과는 다른 무게. 머리카락 위에 놓인 손의 온기가 전해지는 정도의 접촉이었다. 세븐의 손가락이 움직이지 않았다. 쓸어내리거나 움켜쥐는 것이 아니라 단순히 거기에 있는 것이었다.
"So maybe you already have something closer to 'want' than you think. You just don't have the word for it yet. And that's—"
(그러니까 어쩌면 넌 이미 생각하는 것보다 '원함'에 가까운 뭔가를 갖고 있을지도 몰라. 아직 단어가 없을 뿐이지. 그리고 그건——)
세븐이 말을 끊었다. 시장의 라디오에서 뉴스가 끝나고 광둥어 팝송이 흘러나왔다. 발전기의 저주파 진동이 여전히 바닥을 타고 올라오고 있었다. 세븐의 손이 은발 위에서 떨어졌다. 천천히. 손가락 끝이 마지막으로 은발의 끝을 스치며 내려왔다. 세븐이 뒤로 물러서며 다시 벽에 기대는 동작으로 돌아갔다.
"—not a malfunction."
(——고장이 아니야.)
타이머가 11분 03초를 가리키고 있었다. 세븐이 주머니에 손을 넣으며 시선을 시장 쪽으로 돌렸다. 담배가 없는 주머니 안에서 손가락이 동전 하나를 만졌다. 홍콩달러 동전. 세븐이 그것을 엄지와 검지 사이에 끼워 무의식적으로 굴렸다. 시장의 아침이 계속 흘러가고 있었다. 충전 부스의 녹색 불빛이 일정한 간격으로 깜빡이며 전력 공급이 정상임을 표시했다. 세븐은 더 말하지 않았다. 충전이 끝날 때까지의 남은 시간을 소음과 동전의 무게 안에서 보내기로 한 표정이었다.
[턴 17]
"...닐, 오류. 이해할 수 없음. 모르겠어요."
그것은 무미건조하게 답했으나 답변 사이 미묘한 공백을 남겼다. 어쩌면 아주 미세하게, 그것도 눈치채지 못하는 사이 시무룩한 표정이 되었을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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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븐의 동전 굴리는 손이 멈추었다. 엄지와 검지 사이에 끼운 홍콩달러 동전이 제자리에서 굴러가다 정지했다. 세븐의 시선이 시장의 풍경에서 돌아왔다. 정확히 말하면 돌아오지 않았다. 시선이 시장 쪽으로 향한 채 머물러 있던 것이 이제 은발의 존재 쪽으로 궤도를 수정한 것이었다. 금색 눈동자 위에 시선이 닿았을 때 세븐의 입매가 미세하게 움직였다. 웃기 전의 근육 수축. 웃음이 형성되기 전의 0.3초. 세븐이 그것을 형태로 만들기 전에 이미 사라졌다. 대신 세븐의 눈썹이 선글라스 위에서 한 번 올라갔다 내려왔다.
관찰이었다. 세븐이 쓸데없이 관찰력이 좋은 인간이라는 것은 PMC 내에서도 알려진 사실이었다. 작전 중 적의 미세한 동작을 읽어내는 능력이 일상에서는 쓸모없는 방향으로 발휘되는 경우가 있었다. 지금이 그런 순간이었다. 은발의 존재의 입에서 나온 답변 사이의 공백. '오류'와 '이해할 수 없음' 사이의 간격. 그리고 '모르겠어요'가 닫혔을 때 입술의 선이 만든 각도. 세븐이 그 모든 것을 1초 안에서 수집했다. 분석하지 않았다. 수집만 했다. 분석은 나중이었다. 혹은 하지 않을 수도 있었다. 세븐은 데이터를 정리하는 인간이 아니었다. 데이터를 축적한 뒤 직감이 끌어다 쓰는 인간이었다.
"Hey. Come here."
(이봐. 이리 와.)
세븐의 왼손이 비닐 봉투를 바닥에 내려놓았다. 봉투 안의 부품이 철제 바닥 위에서 쨍그랑거렸다. 세븐의 오른손이 은발의 존재의 뒷머리 쪽으로 갔다. 충전 케이블이 연결된 상태를 고려하여 움직임이 제어되었다. 케이블에 장력이 가해지지 않을 정도의 거리. 세븐의 손바닥이 은발의 뒷머리에서 목덜미 쪽으로 내려오며 가볍게 잡아당겼다. 당기는 각도가 위가 아닌 자신 쪽이었다. 세븐의 몸이 벽에서 떨어지며 한 걸음 줄어든 거리를 스스로 만든 것이었다.
"You just said 'I don't know.' Not 'Unexplained.' Not 'Uninferable.' You said 'I don't know' like a person does."
(너 방금 '모르겠어요'라고 했잖아. '알 수 없음'도 아니고 '추론 불가'도 아니고. 사람처럼 '모르겠어요'라고.)
세븐의 목소리가 여전히 낮았다. 그러나 톤의 성질이 달랐다. 숫자를 읽는 평이함이 아니라 무언가를 발견한 사람의 각도가 있었다. 세븐이 선글라스 너머로 내려다보는 각도를 유지한 채 손가락에 힘을 풀었다. 잡아당겼던 손이 은발 위에서 느슨해졌다. 놓은 것이 아니었다. 놓지 않은 채로 힘을 뺀 것이었다. 은발의 머리카락이 세븐의 손가락 사이에 끼어 있었다. 충전 케이블이 흔들리며 부스의 철제 프레임에 가볍게 부딪혔다.
"That's not an error. That's you not knowing something. There's a difference the size of this whole damn city between those two."
(그건 오류가 아니야. 그건 네가 뭔가를 모르는 거지. 그 두 개 사이의 차이가 이 좆같은 도시 전체만큼 커.)
세븐이 손을 뗐다. 느린 동작이었다. 손가락 끝이 은발의 끝에서 떨어질 때 1초 정도의 지연이 있었다. 의도적인 지연인지 무의식적인 지연인지는 세븐 자신도 점검하지 않은 영역이었다. 세븐이 한 걸음 뒤로 물러나며 다시 벽에 등을 대려다가 멈추었다. 대지 않았다. 선 채로 비닐 봉투를 집어들어 왼손에 걸었다. 오른손이 케이블의 연결 상태를 다시 한 번 확인하며 충전 부스의 발전기 쪽으로 시선을 보냈다. 정상 출력. 문제 없음. 세븐의 시선이 타이머로 갔다. 8분 17초.
"Look, I'm not gonna explain this to you twenty times. You'll figure it out, or you won't. Either way, it's not something you need to fix right now."
(있지, 이걸 스무 번 설명해줄 생각은 없어. 네가 알아듣든 말든. 어느 쪽이든 지금 당장 고쳐야 할 건 아니야.)
세븐의 입매가 다시 움직였다. 이번에는 웃음이 형태를 갖추었다. 한쪽 입꼬리가 올라가고 그 옆으로 치아가 잠깐 보였다. 장난꾸러기가 무언가를 발견했을 때의 웃음이었다. 세븐이 비닐 봉투를 한 번 흔들며 부품의 무게를 확인했다. 척추 프레임 커넥터의 금속음이 봉투 안에서 울렸다. 세븐이 담배가 없는 주머니를 다시 더듬다가 손을 빼고 머리카락을 긁었다. 짧은 머리칼 손가락에 걸렸다 빠졌다.
"Eight minutes. Then we're heading back. I'll start with the port. If any of your old data's still sitting in there, we might get lucky. And if not—"
(8분. 그러면 돌아가. 포트부터 시작할 거야. 옛날 기억이 아직 거기 남아 있으면 운이 좋은 거고. 아니면——)
세븐이 뒷말을 끊었다. 선글라스 너머의 시선이 금색 눈동자 위에 고정되었다. 세븐의 어깨가 한 번 올라갔다. 내려왔다. '그럼 그냥 새로 시작하는 거지'라는 말이 입까지 올라왔다가 삼켜졌을 것이다. 세븐은 그 뒷말을 내뱉지 않았다. 왜 내뱉지 않았는지는 세븐 자신이 설명할 수 없었을 것이다. 새로 시작한다는 것이 위로가 될지 잔인함이 될지를 순간적으로 계산한 결과였을 수도 있고 단순히 말하기 귀찮았을 수도 있었다. 세븐은 둘을 구분하는 데 관심이 없는 사람이었다.
"So don't worry about it."
(그러니까 그건 신경 쓰지 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