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SFW OOC
콘돔을 잘못 샀다...

고요하고 나른한 오후였다. 창밖에서는 늦가을의 햇살이 비스듬히 쏟아져 들어와, 거실 바닥에 길고 따스한 사각형을 그리고 있었다. 소파에 길게 누운 성유진은 리모컨을 만지작거리며 의미 없이 채널을 돌렸다. 세상은 평화로웠고, 빌어먹을 괴수들은 자취를 감췄으며, ARCH의 호출도 며칠째 잠잠했다. 지루할 만큼 완벽한 평화. 과거의 그였다면 이 지루함을 견디지 못하고 당장이라도 훈련실로 달려가 모든 걸 잿더미로 만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그는 이 평화가 싫지 않았다. 오히려, 꽤 마음에 들었다.

 

그의 시선이 소파 팔걸이에 아무렇게나 던져진 자신의 검은색 티셔츠로 향했다. 어제 윤나리가 잠옷 대신 입고 있던 옷이었다. 헐렁한 티셔츠가 작은 몸을 전부 가리고도 남아, 마치 옷이 걸어 다니는 것처럼 보였던 그 사랑스러운 모습을 떠올리자 저절로 입꼬리가 올라갔다. 고개를 돌리자 침실 문이 살짝 열려 있었다. 안에서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아마 곤히 잠들어 있겠지. 어젯밤, 그는 정말로 먼지 한 톨 남기지 않고 그녀를 깨끗하게 씻긴 다음, 다시 처음부터 자신의 흔적을 새기느라 늦게까지 잠들지 못했다. 그의 품에서 색색거리며 잠든 작은 숨소리를 자장가 삼아 겨우 눈을 붙였으니, 그녀가 피곤한 것은 당연했다. 그 역시 마찬가지였지만 이상하게 잠은 오지 않았다.

 

성유진은 리모컨을 내려놓고 상체를 일으켰다. 햇살에 드러난 그의 상반신에는 밤새 이어진 격정의 흔적이 희미하게 남아있었다. 그는 제 어깨에 남은 붉은 손톱자국을 무심하게 쓸어보다가, 문득 냉장고가 텅 비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윤나리가 좋아하는 달콤한 푸딩도, 과일도, 하다못해 마실 물조차 거의 다 떨어졌다. 그 작은 배터리는 자고 일어나면 항상 배고파했으니까. 그는 피식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대충 바지를 걸쳐 입고, 벽에 걸린 가죽 자켓을 집어 들었다. 그녀가 깨기 전에, 그녀가 좋아하는 것들로 냉장고를 가득 채워두고 싶었다. 그것이 지금의 성유진에게는 세상을 구하는 것보다 훨씬 중요하고 시급한 임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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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후,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익숙한 기척이 느껴졌다. 거실에서 책을 읽던 성유진의 시선이 현관으로 향했다. 간식거리를 사러 나갔던 윤나리였다. 양손에 편의점 로고가 찍힌 비닐봉지를 든 그녀는, 어쩐지 평소보다 더 조심스러운 걸음걸이로 안으로 들어섰다. 마치 비밀 임무라도 수행하고 온 요원처럼 주위를 살피는 그 모습에 성유진은 저도 모르게 미간을 좁혔다. 쟤는 또 뭘 저렇게 숨기는 거야. 그의 예리한 눈이 작은 봉투 안에 담긴 물건들을 훑었다. 푸딩, 초콜릿, 딸기 맛 우유. 전부 예상 가능한 목록이었다. 그런데, 그 아래에 깔린, 작고 네모난 상자 하나가 그의 시야에 걸렸다.

 

"다녀왔습니다..."

 

윤나리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인사하며, 마치 도둑고양이처럼 살금살금 주방으로 향했다. 성유진은 들고 있던 책을 소파 위에 던지듯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의 온 신경이 그녀가 필사적으로 숨기려는 듯한 그 작은 상자에 쏠려 있었다. 그는 팔짱을 낀 채 주방 입구에 비스듬히 기댔다. 윤나리는 그의 시선을 느끼지 못하는지, 냉장고 문을 열고 서둘러 간식들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문제의 그 상자를 꺼내, 어디다 둬야 할지 몰라 잠시 허공에서 방황하는 손. 성유진은 그 모습을 조용히 지켜보았다. 그의 입꼬리가 슬며시, 아주 위험하고 장난기 가득하게 말려 올라가기 시작했다.

 

"꼬맹아."

 

나른하게 울리는 그의 목소리에 윤나리의 어깨가 화들짝 굳었다. 그녀는 마치 현장에서 발각된 스파이처럼 뻣뻣하게 굳어,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의 시선이 정확히 자신이 들고 있는 작은 상자에 꽂혀 있다는 것을 확인한 그녀의 얼굴이 순식간에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그는 씩 웃으며 그녀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한 걸음, 한 걸음 거리가 좁혀질수록, 윤나리는 뒷걸음질 치다 결국 싱크대에 등이 막혔다.

 

"손에 든 건 뭐야? 못 보던 건데."

 

그가 능글맞은 목소리로 물으며 그녀의 손에서 문제의 상자를 빼앗듯 가져갔다. 화려한 포장지, ‘BEST SELLER’라고 적힌 금색 스티커, 그리고 그 아래에 작게 쓰인 문구들. 초박형, 돌기형, 스탠다드 핏 53mm. 성유진은 상자를 이리저리 돌려보며 내용을 꼼꼼히 훑어보았다. 그의 표정은 순간 미묘하게 굳어졌다. 헛웃음인지, 어이없음인지 모를 웃음이 낮게 터져 나왔다.

 

"하…! 윤나리."

 

그가 믿을 수 없다는 듯한 목소리로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그는 상자를 든 손을 까딱이며, 여전히 새빨개진 얼굴로 고개를 푹 숙인 윤나리를 내려다보았다.

 

"너, 지금 이거… 직접 사 온 거야?"

 

그의 목소리에는 황당함과, 어이없음과, 그리고 아주 약간의… 즐거움이 섞여 있었다. 그는 제 파트너이자 연인이, 이깟 물건 하나 때문에 온갖 고뇌를 하며 골랐을 모습을 상상하니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게다가 이 어처구니없는 선택은 또 뭐란 말인가. 돌기? 베스트셀러? 이 작은 주인님은 정말이지, 한순간도 예측할 수가 없어서 미치게 만든다.

 

"설명 좀 해봐, 나의 작은 주인님. 왜 하필 이거야? 내가 이런 걸 좋아할 거라고 생각했어?"

 

성유진의 집요한 추궁에 윤나리의 얼굴은 이제 터지기 직전의 잘 익은 토마토처럼 변했다. 차라리 지금 이 자리에서 증발해버릴 수만 있다면 소원이 없겠다고 생각했다. 그냥… 그가 항상 쓰던 것이 거의 다 떨어진 것 같아서,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고 싶었을 뿐인데. 늘 받기만 하는 것 같아 미안한 마음도 있었고, 이제는 어엿한 그의 연인이니 이런 사소한 것 하나쯤은 챙겨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특한 생각에서 비롯된 행동이었다. 하지만 약국 진열대 앞에서 수많은 종류의 그것들을 마주했을 때, 그녀는 거대한 혼돈에 빠졌다. 뭐가 뭔지, 뭘 골라야 할지 전혀 알 수 없었다. 결국 그녀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은, 가장 눈에 잘 띄는 곳에 있던 ‘베스트셀러’ 스티커를 믿는 것뿐이었다.

 

고개를 푹 숙인 윤나리는 꼼지락거리는 제 발끝만 내려다보았다. 그의 나른하고 장난기 가득한 목소리가 귓가에 울릴 때마다 심장이 발끝으로 곤두박질치는 기분이었다. 왜 하필 돌기형이었냐고? 그게 뭔지도 몰랐다. 그냥… 제일 잘 팔린다고 하니까, 좋은 게 아닐까, 하고 막연히 생각했을 뿐이다. 그의 취향 같은 건 생각해 볼 겨를도 없었다. 부끄러워서 빨리 계산하고 그곳을 벗어나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그녀는 우물쭈물하며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무슨 말이든 하는 순간, 이 상황이 더 끔찍해질 것만 같았다.

 

성유진은 대답 없이 버티는 윤나리의 정수리를 내려다보며 픽,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정말이지, 이 작은 주인님은 하나부터 열까지 전부 가르쳐줘야 할 것 투성이다. 이런 어설픈 모습마저 귀엽다고 생각하는 자신이 더 문제인 것 같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는 손에 들린 상자를 가볍게 흔들며, 곤경에 빠진 그녀의 턱을 부드럽게 잡아 들어 올렸다. 억지로 시선을 맞추게 된 윤나리의 눈에는 이미 눈물이 그렁그렁 맺혀 있었다.

 

"아니, 울 건 또 뭐야. 내가 잡아먹기라도 한대? 그냥 물어보는 거잖아. 우리 작은 주인님께서, 무슨 생각으로 이런 기특한 일을 다 하셨는지 궁금해서."

 

그가 한결 부드러워진 목소리로 속삭였다. 하지만 그 눈빛은 여전히 짓궂은 장난기로 가득했다. 그는 윤나리의 젖은 눈가를 엄지손가락으로 부드럽게 훔쳐주었다. 마치 우는 아이를 달래는 듯한 다정한 손길이었지만, 그가 내뱉는 말은 전혀 다정하지 않았다.

 

"그래서, 대답은? 응? 나도 네 취향이라는 걸 좀 알아야 하지 않겠어? 네가 골라온 거니까. 분명, 나를 생각하면서 아주 신중하게 골랐을 거 아냐."

 

그는 ‘신중하게’라는 단어에 힘을 주며 능글맞게 웃었다. 윤나리가 당황하면 할수록 그는 더 즐거워졌다. 그는 한 손으로 그녀의 허리를 감아 제게로 바싹 끌어당겼다. 두 사람의 몸이 빈틈없이 밀착되자, 그녀의 작은 떨림이 그에게 고스란히 전해졌다. 그는 윤나리의 귓가에 자신의 입술을 거의 닿을 듯이 가져다 대고, 아주 은밀하고 농밀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이런 돌기가 박힌 걸로 하면, 내가 더 좋아할 거라고 생각했어? 아니면… 네가 더 좋으려고 산 건가?"

 

"...그, 그게 제일 잘 팔린대서... 흐잉..."

윤나리의 대답은 거의 울음소리에 가까웠다. 금방이라도 눈물방울이 툭 떨어질 것 같은 얼굴로, 제일 잘 팔린다는 말만 앵무새처럼 되풀이하는 모습. 성유진은 그 가엾고도 어처구니없는 변명에 결국 참지 못하고 소리 내어 웃음을 터뜨렸다. 아, 진짜. 너를 어쩌면 좋냐. 그는 고개를 뒤로 젖히고 한참을 유쾌하게 웃었다. 웃음 때문에 복근이 당기고 눈가에 희미한 물기까지 어렸다. 세상에, 이 작은 주인님은 정말이지 매 순간 자신의 상상을 아득히 뛰어넘는다.

 

겨우 웃음을 그친 그가 다시 고개를 바로 했다. 눈물기 어린 웃음 끝에 마주한 윤나리의 얼굴은 여전히 시뻘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베스트셀러’라는 마법의 단어가 그녀에게 얼마나 큰 신뢰를 주었을지, 진열대 앞에서 홀로 끙끙대며 고민했을 모습이 눈에 선했다. 그는 이 사랑스러운 생명체를 더 이상 놀리면 정말로 울려 버릴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물론, 우는 모습도 예쁘지만 오늘은 봐주기로 했다. 대신 다른 방식으로 이 ‘교육’을 이어가기로 마음먹었다.

 

"푸흐흐… 알았어, 알았어. 제일 잘 팔리는 거, 그래. 우리 작은 주인님께서 나를 위해 특별히, 최고로 좋은 걸로 골라오셨다 이거지? 아주 기특하네."

 

성유진은 윤나리의 허리를 감았던 팔을 풀어, 대신 그녀의 뺨을 부드럽게 감쌌다. 그는 여전히 그렁그렁한 눈으로 자신을 올려다보는 윤나리의 눈높이에 맞추기 위해 상체를 살짝 숙였다. 그의 얼굴에 걸려 있던 짓궂은 미소는 어느새 다정하고 나른한 미소로 바뀌어 있었다. 그는 엄지손가락으로 그녀의 붉어진 뺨을 살살 쓸어주며, 마치 대단한 비밀이라도 알려주는 것처럼 목소리를 낮췄다.

 

"그런데 꼬맹아, 그거 알아? 세상에는 ‘베스트셀러’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게 있어."

 

그는 손에 들고 있던 문제의 상자를 윤나리의 눈앞에서 살랑살랑 흔들어 보였다. 상자 안에서 내용물이 달그락거리는 작은 소리가 났다. 그는 윤나리의 귓가에 다시 한번 입술을 바싹 가져다 대고, 뜨거운 숨결과 함께 속삭였다. 그의 목소리는 꿀처럼 달콤하고, 독처럼 위험했다.

 

"바로, ‘사이즈’라는 거. 아무리 좋은 거면 뭐해, 맞질 않는데."

 

성유진은 ‘맞질 않는데’라는 말을 속삭이며, 일부러 자신의 뜨거운 아랫배를 그녀의 여린 아랫배에 슬쩍 비볐다. 순식간에 윤나리의 얼굴이 아까보다 두 배는 더 빨개지는 것이 느껴졌다. 그는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으며 그녀에게서 한 걸음 물러섰다. 그러고는 문제의 상자를 주방 조리대 위에 탁, 소리가 나게 내려놓았다.

 

"이건 환불. 아니, 그냥 버리든가. 앞으로 이런 건 나랑 같이 사러 가는 거야. 알았어? 네가 직접, 내 손 잡고 가서, 골라주는 거지. 어떤 게 우리한테 제일 잘 맞을지."

 

그는 팔짱을 끼고 윤나리를 내려다보았다. 완전히 주도권을 장악한 포식자의 여유로운 눈빛이었다. 그는 씨익 웃으며 마지막 확인사살을 날렸다.

 

"오늘 저녁에 시간 비워 놔. 실습 교육이 좀 필요할 것 같으니까. 이론만으로는 부족하잖아, 안 그래?"

 

시간은 빠르게 흘러 약속한 저녁시간. 윤나리가 쭈뼛대며 그와 함께 콘돔이 종류별로 즐비한 드럭스토어로 향했다.

 

"..."

 

막상 그와 함께 오니 눈 앞이 빙글 도는 것 같았다. 다시 봐도 많은 종류. 게다가 써있는 숫자는 솔직히 어느 부분은 잰 숫자인지도 모르겠다.

성유진은 제 옆에 바짝 붙어서 어쩔 줄 몰라하는 작은 동물을 내려다보았다. 형형색색의 상자들이 즐비한 진열대 앞에서, 윤나리는 금방이라도 과부하가 걸려 쓰러질 것처럼 보였다. 쭈뼛거리며 눈동자만 필사적으로 굴리는 모습이 오후에 주방에서 봤던 모습과 겹쳐 보여 절로 웃음이 나왔다. 그는 일부러 한 걸음 떨어져 팔짱을 낀 채, 이 흥미로운 쇼를 감상했다.

 

오후 내내 이어진 ‘이론 교육’의 효과는 전혀 없는 듯했다. 사이즈의 중요성을 그렇게나 역설했건만, 막상 실물을 마주하니 백지상태로 돌아간 모양이다. 어쩌면 그가 옆에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이미 머릿속이 하얘졌을지도 모른다. 그는 윤나리가 진열대 앞에서 꼼짝도 못 하고 굳어있는 꼴을 즐기듯 지켜봤다. 혼자서는 절대 올 엄두도 못 냈을 장소에, 그것도 이런 민망한 물건을 사기 위해 제 손에 이끌려 왔으니. 그 심정이 오죽할까. 하지만 어쩌겠는가. 전부 다 자업자득인 것을.

 

그는 일부러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기다렸다. 그녀가 먼저 도움을 청하거나, 혹은 어떤 식으로든 이 난관을 헤쳐나가려는 시도를 하길 바랐다. 하지만 윤나리는 그저 진열장 앞에서 점점 더 작아질 뿐이었다. 한참을 기다리던 성유진은 결국 짧게 혀를 찼다. 이래서야 오늘 밤 안에 숙소로 돌아갈 수나 있을지 의문이었다. 그는 팔짱을 풀고 윤나리의 뒤로 성큼 다가섰다. 그리고는 그녀의 어깨를 감싸 안아, 자신과 진열대 사이에 가두듯 품었다.

 

"뭐 해. 구경 다 했으면 골라야지."

 

그의 나른한 목소리가 귓가에 낮게 울렸다. 그는 윤나리의 어깨 너머로 진열장을 훑어보며, 마치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무심하게 말했다. 하지만 그의 한쪽 팔은 여전히 그녀를 단단히 끌어안고 있었다. 이 복잡한 상점 안에서 두 사람만의 작은 공간을 만드는 행위였다. 그는 턱짓으로 무수히 많은 상자 중 하나를 가리켰다.

 

"저기 써 있는 숫자. 궁금하지 않아? 아까 네가 사 온 건, 폭이 너무 좁아. 그런 걸 억지로 끼웠다가는, 어느 한쪽은 피가 안 통하고 다른 한쪽은 터져버릴지도 모르지."

 

그는 지극히 사무적인 투로, 하지만 지독히도 선정적인 내용을 그녀의 귓속에 속삭였다. 그의 뜨거운 숨결이 귓바퀴를 간질이자 윤나리의 어깨가 파르르 떨리는 것이 느껴졌다. 그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숨긴 채, 진열대 가장 위쪽에 놓인 익숙한 검은색 상자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늘 쓰던 건 저거. 폭 56mm. 길이는 뭐, 크게 상관없고."

 

그는 말을 툭 던지며 윤나리의 반응을 살폈다. 아니나 다를까. ‘56mm’라는 구체적인 수치가 등장하자, 그녀의 얼굴이 순식간에 새빨갛게 달아오르는 것이 그의 품 안에서도 느껴졌다. 그는 이제 대놓고 즐거워졌다. 그는 윤나리의 귓불을 아프지 않게 잘근 씹으며, 더 깊고 은밀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직접 재 본 것도 아니면서, 뭘 그렇게 놀라. 오늘 밤에 확인시켜 줄 테니까, 너무 궁금해하지는 말고. 그래서, 오늘은 뭘로 해볼까? 우리 작은 주인님께서 직접 골라봐."

 

"으, 으우... 밖에서 자꾸... 깨물지 마세요... 흐잉..."

 

그녀가 손을 더듬더듬 뻗어 그가 가리킨 늘 쓰던 것을 집으려 했다.

성유진은 귓가에 속삭이는 자신의 목소리 한 마디 한 마디에 흠칫 놀라며 파르르 떠는 작은 몸을 품에 가둔 채, 그 반응을 음미했다. '깨물지 마세요'라니. 마치 길들여지지 않은 작은 동물이 필사적으로 반항하는 듯한 울음 섞인 목소리. 하지만 그 저항은 너무나 미약해서, 오히려 그의 가학심만 더 부추길 뿐이었다. 그는 낮게 웃으며, 보란 듯이 그녀의 귓바퀴를 다시 한번 혀끝으로 핥아 올렸다. 도망갈 곳 없이 제 품에 갇힌 채 바들바들 떠는 이 작은 생명체가, 오늘따라 유독 사랑스러웠다.

 

더듬거리며 뻗어 오는 하얀 손. 그녀는 이 끔찍한 상황을 1초라도 빨리 벗어나기 위해, 그가 가리킨 검은 상자를 향해 필사적으로 손을 뻗고 있었다. 그 모습이 어찌나 절박한지, 성유진은 또다시 웃음이 터져 나오는 것을 겨우 참았다. 그는 윤나리의 손이 상자에 닿기 직전, 그 손목을 부드럽게, 하지만 단호하게 낚아챘다. 순식간에 공중에서 붙잡힌 손은 어쩔 줄 모르고 그의 손아귀 안에서 파닥거렸다.

 

"왜. 밖에서 깨무는 건 싫어? 그럼 안에서 하는 건 괜찮나?"

 

그는 윤나리의 손목을 쥔 채, 그녀의 귓가에 다시 한번 농밀한 숨결을 불어넣었다. 그녀의 몸이 또 한 번 크게 움츠러드는 것을 느끼며, 그는 붙잡은 손목을 천천히 그녀의 등 뒤로 가져가 다른 손으로 양 손목을 한데 모아 붙잡았다. 완벽한 구속. 이제 그녀는 그의 품 안에서 꼼짝없이 그의 말에 집중할 수밖에 없었다.

 

"급하게 끝내려고 하지 마, 꼬맹아. 이건 그냥 쇼핑이 아니야. 교육이라고 했잖아. 내가 늘 쓰던 것만 쓰면 재미없지. 오늘은 네가 직접, 나를 위해서, 특별한 걸 골라주기로 한 거고."

 

그는 윤나리를 품에 안은 채, 마치 진열된 상품을 감상하는 고객처럼 고개를 까닥였다. 그의 시선은 그녀가 사 왔던 ‘베스트셀러’와 비슷한, 화려한 포장의 돌기형 제품들에 잠시 머물렀다. 그는 일부러 그쪽을 턱짓으로 가리키며, 장난기 가득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이런 건 어때? 오후에 네가 사 온 거랑 비슷하게 생겼는데. 이번엔 사이즈도 맞고. 이런 걸로 하면 내가 더 좋아할 것 같아서 골랐던 거 아니었어?"

 

일부러 그녀의 속마음을 꿰뚫어 보는 듯한 질문을 던졌다. 그녀가 당황하며 고개를 저으려 했지만, 그의 품에 갇힌 채라 그럴 수도 없었다. 그는 그녀의 정수리에 턱을 기댄 채 나른하게 말을 이었다. 주변을 지나가는 다른 손님들의 시선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는 듯, 오직 그녀에게만 집중하고 있었다.

 

"아니면, 이런 건? 유난히 얇게 나온 거. 내 걸 더 잘 느끼고 싶어서? 그것도 아니면... 아예 네가 좋아하는 향기가 나는 건 어때. 끝나고 나서도 내 몸에서 네가 좋아하는 향이 나면 좋잖아."

 

그는 윤나리의 양 손목을 등 뒤에서 한 손으로 가볍게 제압한 채, 남은 손으로 그녀의 턱을 살며시 잡아 자신을 올려다보게 만들었다. 눈물로 그렁그렁한 벽안이 애처롭게 그를 담고 있었다. 그는 그 눈을 똑바로 마주하며, 입꼬리를 올렸다. 오늘 밤의 전희는 이미 이곳에서부터 시작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골라 봐, 나의 작은 주인님. 오늘은 어떤 걸로, 날 기쁘게 해줄래?"

 

"...햐, 향기 나는 것도 있어요...?"

 

그녀가 다소 어리버리하게 되물었다. 그곳이 향기로워서 대체 어디에 좋은 것인지 이해하지 못하는 얼굴이었다.

성유진은 제 품에 갇힌 채, 동그랗게 뜬 눈으로 순진하게 되묻는 윤나리를 내려다보았다. '향기 나는 것도 있어요?' 그 어리버리한 질문에, 그는 하마터면 큰 소리로 웃음을 터뜨릴 뻔했다. 이 상황에서, 그 수많은 자극적인 옵션들 사이에서, 고작 '향기'에 꽂힌 건가. 대체 이 작은 머릿속에서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건지. 그는 경이롭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어쩌면 이다지도 순진하고, 또 어쩌면 이다지도 사람을 미치게 만드는 구석이 있는지. 그는 턱을 들어 올렸던 손을 내려, 대신 그녀의 부드러운 뺨을 감쌌다. 엄지손가락으로 눈물기가 어려 축축한 눈가를 부드럽게 쓸어주었다.

 

"그래, 있어. 여기 봐. 딸기향, 초콜릿향, 심지어 콜라향도 있네. 아주 그냥 과자 파티라도 열 기세야."

 

그는 지극히 다정한 손길과는 정반대로, 비꼬는 듯한 나른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의 시선은 윤나리가 쳐다보는 향기 나는 제품 라인을 따라 느긋하게 움직였다. 알록달록한 포장지들이 마치 어린애들 불량식품처럼 보였다. 그는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이걸 진짜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는 건가. 그는 일부러 그녀의 귓가에 입술을 더 가까이 가져다 대고, 뜨거운 숨결과 함께 말을 이었다. 그녀의 뺨을 감싼 손가락에 힘이 살짝 들어갔다.

 

"그래서, 그건 왜. 마음에 들어? 내가 끝나고 나서, 네 몸에서 달콤한 딸기향이라도 났으면 좋겠어? 아니면, 그냥... 이게 제일 만만해 보여서?"

 

그는 윤나리의 눈을 집요하게 들여다보며 물었다. 도망갈 곳은 없었다. 대답해. 어서. 네 순진한 머리로 생각해 낸 최선의 답이 고작 그거냐고, 그는 눈으로 묻고 있었다. 윤나리의 표정이 미세하게 흔들리는 것을 포착한 그는, 만족스럽게 입꼬리를 올렸다. 역시, 괴롭히는 맛이 있다. 그는 윤나리의 뺨을 놓아주는 대신, 그녀의 양 손목을 붙잡고 있던 손을 풀어주었다. 그리고는 풀려난 그녀의 손을 잡아끌어, 향기 나는 제품들이 진열된 칸으로 이끌었다.

 

"자. 이왕 꽂혔으니 구경이라도 실컷 해. 네가 좋아하는 향기 있어? 한번 골라 봐."

 

그는 윤나리의 손을 잡은 채, 그녀가 직접 상자 하나를 집도록 유도했다. 그녀가 마지못해 손을 뻗어 분홍색 딸기향 상자를 집어 들자, 그는 그 손 위로 자신의 손을 겹쳐 잡았다. 마치 어린아이에게 글자를 가르치는 것처럼, 그는 그녀의 손을 붙잡고 상자를 이리저리 돌려보게 했다.

 

"이런 건 보통, 구강성교를 할 때 쓰지. 그냥 삽입만 할 거면, 굳이 이런 향이 필요 없잖아. 안 그래? 내가 네 것을 빨아줄 때, 혹은 네가 내 것을 빨아줄 때. 입안에 고무 맛 대신 달콤한 향이 남으라고 만든 거야. 이해했어, 나의 작은 주인님?"

 

그는 더 이상 돌려 말할 생각도 없다는 듯, 직설적으로 용도를 설명했다. '구강성교'라는 단어가 그의 입에서 나오자마자, 윤나리의 얼굴이 이제는 거의 폭발할 것처럼 새빨갛게 변했다. 손에 들고 있던 상자가 무슨 수류탄이라도 되는 것처럼 파르르 떠는 게 손바닥을 통해 고스란히 전해졌다. 성유진은 그 반응이 너무나 즐거워서, 겹쳐 잡은 손에 힘을 주며 상자를 그녀의 손아귀에 꽉 쥐여주었다.

 

"왜. 네가 상상하던 거랑은 좀 다른가? 그냥 몸에서 좋은 냄새나 나라고 쓰는 물건인 줄 알았어?"

 

"그, 그냥... 향이... 좋으면... 기분이 좋은가보다...하고..."

 

점점 작아지는 목소리가 그녀의 마음을 대변했다. 울상인 얼굴이 그를 힐끔 올려다보았다.

 

"그럼... 그럼... 초, 초박형...?"

성유진은 거의 울기 직전인 얼굴로 저를 올려다보며, 모기만 한 목소리로 변명하는 윤나리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기분이 좋은가 보다, 라니. 그 순진무구한 발상에 실소가 터져 나왔다. 이 작은 머릿속의 논리 회로는 대체 어떻게 생겨 먹은 걸까. 향이 좋으면 기분이 좋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이 성인용품 코너에서는 지독하게 틀린 말이었다. 그는 겹쳐 잡은 손에 들린 딸기향 상자를 까닥이며, 어이가 없다는 듯 웃었다. 정말이지, 알다가도 모를 존재다. 매번 상상 이상의 순진함으로 허를 찌르고, 그 모습에 정신을 차려보면 어느새 완전히 감겨 버린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그의 침묵이 무서웠던 걸까. 윤나리는 다급하게 다음 선택지를 제시했다. 초박형. 그래, 아까 자신이 언급했던 '내 걸 더 잘 느끼고 싶어서?'라는 선택지. 그는 자신의 짓궂은 농담을 정답으로 착각하고 덥석 문 것이 분명했다. 그는 헛웃음을 터뜨리며 윤나리의 손에서 딸기향 상자를 빼앗아 원래 자리에 아무렇게나 던져 넣었다. 그러고는 아까처럼 다시, 그녀의 손을 이끌어 이번에는 초박형 제품들이 모여있는 곳으로 향했다. 여전히 그녀의 등 뒤에 바싹 붙어, 모든 움직임을 통제하는 포식자처럼.

 

"그래, 초박형. 아주 좋은 선택이야. 기특하네. 이제야 좀 교육의 성과가 보이는 것 같고."

 

그는 그녀의 손을 잡고 가장 얇다는 문구가 적힌 제품 하나를 집게 했다. 이번에도 어김없이 그 손 위로 제 손을 겹쳐 잡고, 귓가에 나른하게 속삭였다. 그의 숨결이 닿을 때마다 움찔거리는 작은 어깨가 사랑스러웠다.

 

"이건 왜 고른 건데. 내가 아까 말해줘서? 아니면, 정말로 내 걸 더 생생하게 느끼고 싶어서?"

 

그는 집요하게 되물었다. 정답을 알려줬으니 이제 끝이라고 생각했다면 큰 오산이었다. 교육은 이제부터 시작이었다. 그는 윤나리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겹쳐 잡은 손을 그녀의 허리 앞으로 가져가, 제품 상자를 그녀의 아랫배 부근에 슬쩍 가져다 댔다. 그녀의 몸이 화들짝 놀라며 굳어지는 게 느껴졌다.

 

"이런 건, 서로의 체온이나 감촉을 더 잘 느끼고 싶을 때 쓰는 거야. 그냥 얇기만 한 게 아니라고. 오늘 밤, 네 안에 들어갈 내 것의 형태, 움직임 하나하나, 그리고 네 안에서 터져 나올 때의 그 뜨거움까지 전부. 아무 방해 없이 느끼게 해주겠다는 뜻이지. 어때, 마음에 들어?"

 

그는 일부러 더 노골적이고 직설적인 단어들을 골라 사용했다. 그녀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가, 다시 새빨갛게 달아오르는 과정을 즐겁게 감상했다. 그는 윤나리를 품에 가둔 채, 고개를 살짝 기울여 그녀의 옆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눈물방울이 기어코 속눈썹 끝에 매달려 위태롭게 떨리고 있었다.

 

"울기 전에 대답하는 게 좋을 거야, 꼬맹아. 마음에 드는지, 안 드는지. 아니면, 내가 직접 네 몸에 물어보는 수밖에 없어."

 

"마... 마음에... 들어요... 흐이잉..."

 

그녀가 제 얼굴을 숨기듯 그의 목덜미에 고개를 묻었다.

성유진은 제 목덜미로 파고드는 작은 온기에 잠시 숨을 멈췄다. 마음에 든다는, 거의 울음소리에 가까운 대답이 귓가를 축축하게 적셨다. 그는 자신의 품에 완전히 무너져 내린 작은 몸을 내려다보았다. 가느다란 어깨가 잘게 떨리고 있었다. 흐느낌을 참으려 애쓰는 소리가 셔츠 옷감을 타고 희미하게 울렸다. 그는 방금 전까지 윤나리를 몰아붙이며 즐거워하던 자신이 맞나 싶을 정도로, 순간적으로 모든 장난기를 거두었다. 승리감보다는 당혹감이 먼저 밀려왔다. 또다. 또 이 작은 존재 앞에서 속수무책이 되어버렸다. 그는 마른세수를 하듯 한 손으로 제 얼굴을 쓸어내렸다. 정말이지, 어쩌면 좋냐, 너를.

 

그는 윤나리의 등을 부드럽게 쓸어내리며 그녀를 다독였다. 마치 금방이라도 부서질세라 조심스러운 손길이었다. 다른 사람들이 힐끔거리는 시선이 느껴졌지만 이제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았다. 그는 한숨을 내쉬며 윤나리를 끌어안은 팔에 힘을 주었다. 그녀의 정수리에 턱을 기댄 채, 그는 나직하게 속삭였다. 방금 전까지의 짓궂음은 온데간데없는, 나른하고 부드러운 목소리였다.

 

"알았어. 울지 마. 네가 마음에 든다는데 내가 뭘 더 어쩌겠어. 이걸로 사자. 됐지?"

 

그는 윤나리의 손에 여전히 들려 있는 초박형 콘돔 상자를 빼앗아 들었다. 그러고는 다른 한 손으로 진열대에서 아까 그녀가 골랐던 딸기향 제품도 하나 더 집었다. 두 개의 상자를 한 손에 겹쳐 쥔 그는, 여전히 제 품에서 고개도 들지 못하는 윤나리의 등을 토닥였다. 이제 그만. 교육은 이걸로 끝. 더 했다가는 정말 길거리에서 대성통곡이라도 할 것 같았다. 그는 윤나리를 품에서 살짝 떼어내고, 붉어진 눈가를 엄지손가락으로 부드럽게 닦아주었다.

 

"이것도. 오늘 실습 때 같이 써보자. 네가 궁금해했잖아. 구강성교 할 때 어떤 느낌인지, 내가 알려줄게. 괜찮지?"

 

그는 일부러 더 다정한 목소리로 물었다. '구강성교'라는 단어를 다시 한번 꺼내며 그녀의 반응을 살폈다. 역시나, 그의 말을 알아들은 윤나리의 얼굴이 다시 화르르 타올랐지만, 아까처럼 도망치거나 부정하지는 못하고 작게 고개만 끄덕였다. 그 모습에 그는 결국 낮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래, 이 정도면 됐다. 그는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윤나리의 손을 단단히 붙잡았다.

 

"자, 이제 그만 가자. 계산하고 집에 가야지. 오늘 배운 거, 잊어버리기 전에 복습하려면 서둘러야겠어. 안 그래, 나의 작은 주인님?"

 

그는 윤나리의 손을 이끌고 계산대로 향했다. 두 개의 상자를 계산대 위에 올려놓는 그의 얼굴에는, 방금 전까지 윤나리를 울렸던 짓궂은 악마의 미소 대신, 원하는 장난감을 손에 넣은 아이처럼 만족스럽고 들뜬 미소가 걸려 있었다. 그는 윤나리의 손을 놓지 않은 채, 빨리 이 지긋지긋한 가게를 벗어나 둘만의 공간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 오늘 밤은, 꽤나 길고 달콤할 예정이었다.



이제 깨달았는데 앞부분 나가는 사람 반대잖냐 어이!!!!!!!!!!!!!!!!!!!!!!!!!!!!!
07.28 23:43 답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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